원리본체론 - 후편 - 제9장 재림론 - 2

2013. 1. 6. 19:58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재림주는 언제 오시는가?          

 

마태복음 24장 36절에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부터 2절에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을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열거한 두 성구는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한편 아모스 3장 7절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먼저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노아 때에도 홍수심판이 임하리라고 알려주고 나서 홍수심판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홍수심판을 하겠으니 방주를 지으라고 미리 알려주셨습니다(창세기 6장 13~14절).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가르쳐주었고(창세기 19장 12~13절),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도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요나 3장 4절).

 

예수님의 탄생도 미리 가르쳐주었습니다. 마리아·요셉·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을 알았습니다(마태복음 1장 18~23절, 2장 1~6절). 그러나 제사장·율법사·서기관 등은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판단하고 자기 관념으로 보았습니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동방박사들은 이 땅에 구세주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준비된 유대 관원들은 메시아가 탄생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다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1) 재림의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3장 3절에는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도적같이 아무도 모르게 오시더라도 지혜롭고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천국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을 놓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했습니다.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섰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도 없이 등만 가지고 갔고, 슬기있는 처녀들은 기름과 등을 함께 가져갔는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거나 잠을 잤습니다.

 

밤중에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에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갔습니다. 다급해진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8절)면서 사정합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이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절)면서 거절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할 수 없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그 동안에 신랑이 왔습니다. 기름을 사러 갔던 처녀들이 돌아와 보니 예비한 처녀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남은 처녀들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11절) 하고 애원했지만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런즉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2~13절)

 

지혜로운 사람과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신랑 되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하기 때문에 가르쳐주어도 모릅니다.

 

(1) 복귀섭리를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때는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복귀섭리는 메시아를 보내는 섭리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아브라함 때까지 모든 탕감복귀섭리를 완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노아·아브라함 3대에 걸쳐서 완성해야 할 탕감복귀섭리를 아브라함이 헌제를 실수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에서 다시 3대를 거쳐 종적인 탕감조건을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 탕감복귀 원칙에 따라 아브라함에서 이삭을 거쳐 야곱에 이르러 3대 만에 처음으로 에서와 야곱, 곧 가인 편과 아벨 편이 하나 되어서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를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과 야곱 대(代)에 메시아가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이 얍복 강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한 후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 민족을 택함 받은 민족, 즉 선민(選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민족이 형성되어야 메시아가 오시기 때문에 애급에서 자손을 번식하여 데리고 나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그 기반을 통해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가정에서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애급고역 400년, 모세를 중심해서 출애급한 뒤에 사사시대 400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의 통일왕국시대까지 210년, 말라기 선지자를 중심해서 메시아 강림 준비시대 400년을 거쳐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는 1930년입니다. 400년, 400년, 120년, 400년, 210년, 400년을 더하면 1930년입니다. 예수님이 30세가 되어서 메시아를 선포했으니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1930년 만의 일입니다. 복귀역사는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 전시대와 후시대로 갈라집니다. 그것을 기원전, 기원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복귀섭리역사를 완성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다시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야곱의 12자식과 70가족이 애급에 가서 고역을 산 것처럼, 예수님의 12제자와 70문도가 로마제국으로부터 400년 간 박해를 받습니다.

 

그 후에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 기독왕국시대 120년이 잘못되었으므로 그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서왕국 분립시대 400년,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를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을 거쳐 루터가 나와서 종교개혁을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후 400년 동안 메시아 제강림을 준비해서 재림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잘못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대 민족사는 다시 오시는 재림주의 섭리사에서 제외됩니다. 그래서 섭리는 서양사로 옮겨집니다. 재림주가 오기까지 동시성 연도를 전부 합치면 1930년입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기 때문에 1517년에다 400년을 더하면 1917년이 나옵니다.

 

그래서 1917년부터 1930년 사이에 재림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1920년경에 오셔서 40세가 될 때까지 메시아의 길을 걸어 승리하시고 1960년에 참부모 선포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의 1930년에다 예수님이 30세가 되어 메시아를 선포한 해를 합친 1960년과도 일치합니다.

 

(2) 종말현상으로 보아            

 

재림주님이 오시는 때는 종말현상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에서 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3대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3대축복을 3대 시험을 통해서 사탄으로부터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됨으로써 사탄에게 그것을 또 내어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재림주가 오실 때는 사탄 편과 하나님 편으로 갈라져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선과 악으로 분립된 세계적인 전쟁이 있게 됩니다. 세계적인 전쟁도 결국엔 제3차 세계대전으로 마지막을 종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땅 빼앗기 싸움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하나님 편이 승리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3대 축복 가운데 제1차 축복 복귀의 기대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메시아의 잉태가 결정된 때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한국이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그때 일제치하에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주권도 없고, 백성도 없는데 메시아가 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아가 찾아오실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잠시나마 조국이 있어야 하고, 민족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을 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립운동이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1919년 3월 1일 천사장권에서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대표하는 33인의 민족대표가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음력 3월 1일(양력 1919년 4월 1일)에 해와의 입장에서 16세인 유관순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음력·양력으로 3월 1일을 중심으로 남자들은 천사장의 입장에서, 유관순은 해와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메시아를 잉태할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된 것입니다.

 

그렇게 3월 1일을 기점으로 어느 여인의 복중에서 메시아의 잉태가 결정되면 그 때부터 열 달을 지나 1920년 1월 중에는 반드시 재림주가 이 땅 위에 탄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리적인 하나님으로서 구체적인 섭리를 해오셨는데, 메시아를 보내는 섭리에서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터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사람을 빼앗기 위한 싸움입니다. 6수는 여섯 째날 인간을 창조한 수입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메시아의 섭리가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 때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방황했습니다. 일본도 패망했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미국·프랑스 등 승전 3개국도 승리는 했지만 세계를 어디로 이끌고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아시는 분은 오직 메시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그런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때가 1945년이니까 1920년에 탄생하신 메시아는 26세의 젊은 청년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준비를 이미 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간 준비했던 기독교가 배신하고, 영적 단체들이 다 배신하고, 승리한 영국·미국·프랑스가 배신했으므로 메시아는 그 기반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홀로 옥중에서 개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40년의 역사를 다시 40년으로 탕감해서 40세에 출발하려고 했던 그 나라를 잃어버리고, 80세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시 펴나가는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3차 세계대전은 하나님 편과 사탄 편이 마지막으로 사상전을 전개하는데, 반드시 하나님 편이 승리하여 평화통일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없고, 만민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사는 만민평등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 중심은 반드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3.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는가?         

 

마태복음 10장 23절에는 이스라엘을 다 돌기 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28절을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로 오시지만 유대 민족이 사는 이스라엘로 오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살해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민족은 2000년 간 나라 없는 설움의 벌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600만 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탕감의 고역을 치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민족을 세워서 실패하면 그 민족을 다시 중심에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은 유대 민족이 사는 이스라엘로 오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장자 기업을 빼앗은 뒤 하란 땅에 가서 가족을 찾고 재물을 취해서 얍복 강에 왔을 때 천사와 싸워서 승리합니다. 그 때 천사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입니다. 또 야곱은 영적 사탄을 굴복시킨 다음 실체 사탄 편에 있는 형님 에서를 자연 굴복시키고 나서야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기대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생긴 사탄의 핏줄을 정리하는 혈통의 승리는 믿음의 기대 위에 메시아가 오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믿음의 승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개인도 믿음의 승리를 세우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다. 민족도, 국가도 그렇습니다. 유대 민족만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어떤 가정이든지 어떤 나라든지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승리적 기대만 세우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11절을 보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나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이미 다른 민족으로 옮겨갔습니다.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도 않고, 재림주가 오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믿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에 집착하여 살다 보니 섭리의 때도, 섭리역사의 내용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은 유대 땅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내주시면 잘 모시고 잘 받들 수 있는 믿음을 세워 승리한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3절부터 43절을 보면, 주인이 포도원을 경영하다가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수확한 과일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고, 종들을 때려 쫓아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고, 종들을 때려 쫓아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른 똑똑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보낸 종들을 죽이고 과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아들은 장차 자기가 경영하는 포도원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 죽여 버리면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성 밖으로 데려가서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 후에 주인은 포도원을 악한 농부들에게 주지 않고 뺏은 뒤 열매를 수확하여 잘 갖다 줄 다른 농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선민권(選民圈)을 말합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준다는 것은 선민권이 옮겨진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했습니다. 농부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4대 선지자와 12소선지자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냈는데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 악한 농부들은 멸하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선민권을 빼앗아 타국민에게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로마서 11장 11절에 ‘저희가 넘어짐으로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져서 구원이 이방으로 옮겨졌으니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000년 전에 보내주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었더라면 오늘날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로 선민권을 받게 될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2절과 3절을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양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말합니다. 어린 양인 재림주가 해 돋는 곳, 즉 동방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동쪽에서 해가 돋지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동방은 아시아입니다. 아시아에도 중동이 있고, 동남아시아가 있고, 극동아시아가 있습니다. 동방은 극동을 말하는데, 중국·일본·한국 3국 가운데 한 나라입니다. 이 세 나라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동방 3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로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일본·한국 세 나라 중 한 나라에 주님이 오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중국은 인구가 많고 땅은 넓지만 공산주의 국가이고, 종교 박해 국가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중국에 메시아를 보내면 죽이고 될 것입니다.

 

일본도 침략국가였고 종교 박해 국가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당시 세계 제패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종교를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 편이 아니고 사탄 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에도 메시아가 오실 수 없습니다.

 

메시아는 한 민족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역사노정을 놓고 인류의 문제를 수습해야 할 분이요, 참된 부모이기 때문에 그 분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만을 위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대해 검토해보겠습니다. 한국은 과거부터 선한 민족이 사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한국 속담 가운데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한민족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에게는 여섯 가지 중요한 민족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천애인사상(敬天愛人思想)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상이 한민족의 중심사상입니다. 경천애인사상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예수님의 중심사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천애인사상은 평화의 사상입니다. 한민족은 먼저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먼저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외적으로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이 발달되어 있을 때에도 그것을 자랑하거나 이용해서 약소국가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반만년 역사 가운데 9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침범을 받고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은 민족은 지구상에 오직 한민족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민족은 평화를 주장하고 평화사상을 주도했습니다.

 

한민족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하고, 넓게 두루 쓰일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킨다든지, 자기 민족을 위해서 타국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전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고 대한민국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둘째로 한민족은 도(道)를 추구하는 도의민족(道義民族)입니다. 한민족의 사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왜 도의민족이고 선한 민족이며,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생활은 바로 효(孝)의 생활로 나타납니다.

 

효는 부모와 자식 간에 세워지는 도리입니다. 천지의 근본 법도는 부자(父子)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하고 고귀한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의 근본 법도인 부자의 법을 세울 수 있는 사상이 효의 사상입니다.

 

한민족은 어떤 민족보다도 효의 사상이 강한 민족입니다. 한국의 시골 마을에 가보면 마을마다 동구 밖에 효자·효녀비가 없는 마을이 거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 이상으로, 자식도 부모를 위해서 살려고 일생을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일생을 살고, 부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부모를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묘 옆에 초막을 짓고 부모가 주신 머리카락, 부모가 주신 수염 하나까지도 귀하게 여기면서 머리도 깎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살아 계실 동안 효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3년 간 시묘(侍墓)살이를 했습니다.

 

색다르거나 귀한 음식이 있으면 살아 계실 때처럼 부모님께 드렸고, 날마다 목욕을 하고, 하루에 세 끼니 밥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속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곡식이 없어서 밥상을 차리지 못하면 정갈한 물을 떠다놓고 절을 했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효의 정신이 한민족 가운데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민족은 다른 어느 민족·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근본 법도의 중심인 효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효의 정신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한민족은 장자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장자에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차자에게 장자권이 넘어갔습니다. 대한민국은 장자권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해마다 부모님의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5대가 지나면 후손이 많이 번성해서 어느 집에서 제사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소에 가서 1년에 한 번씩 시제(時祭)라고 하는 제사를 지냅니다. 그 날은 보통 음력으로 10월 15일입니다.

 

그 때는 후손들이 전국에서 모입니다. 후손들이 모두 정성으로 들여 제삿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기 위해서 일렬로 섭니다. 그 때 중앙 선두에 장손이 서는 것입니다. 비록 장손이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선두에 섭니다.

 

일흔이 된 할아버지라도 장손이 아니면 뒤에 서야 합니다. 그들이 만나서 인사할 때는 어린 장손 앞에 겸손하게 인사합니다. 장자를 중심한 이런 질서와 예절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반면에 장자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한민족은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 한민족은 가정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오늘날은 대부분 핵가족이 되어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만,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대개 한 집에서 3~4개가 모여 같이 살았습니다. 대가족이 같이 살았지만 행복했습니다.

 

왜 대가족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가정의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조부모가 계시고, 부모가 계시고, 아들딸, 손자, 조카 모두가 모여 삽니다. 그로 인해 가끔 싸움도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이 넓습니다. 그 부모 또한 마음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모두가 자기 가정을 중심한 생활만을 합니다. 아기도 하나만 낳자고 합니다. 자식을 한 명만 낳으면 키우기는 쉽지만 자식이 하나뿐이니 부모는 자식에게만 매달립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마음이 좁아지고 자식은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 자녀는 나중에 결혼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이혼율이 어디서 높게 나타나는지 통계를 내본 결과, 홀로 자란 사람에게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과 부딪쳐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님·언니·동생들과 함께 자란 사람은 어려서부터 같이 잠도 자고 뒹굴면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 혹은 딸 하나를 낳아 키우다 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심리학자들은 남자아이 하나만 낳아서 키울 때는 장난감을 줄 때 남자아이 장난감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상대적 장난감을 주고 길러야 한다고 합니다. 또 여자 아이 하나만 키울 때는 남자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주고 키워야 상대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자꾸 작아지게 됩니다. 결국은 결혼을 해도 부부가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서는 가정이 위기에 처했다고 봅니다.

 

한국인의 민족성을 연구해 보면, 다른 민족은 이해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심정(心情)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여러 형제들이 모여서 대가족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심정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재림주가 오실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한민족은 혈통을 소중히  여깁니다. 타락으로 인해 핏줄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역사적 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핏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주는데 메시아는 핏줄을 더럽히거나 마음대로 하는 민족에게는 오실 수 없습니다.

 

한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핏줄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입니다.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명치시대(明治時代)까지 성(姓)도 없었습니다. 성이 없으니까 질서가 없습니다. 사촌과 부부가 되기도하고, 가까운 친척끼리도 부부가 되었습니다. 근친상간으로 문제가 많이 생긴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8촌까지 결혼하지 않는 것은 물론, 동성동본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한민족은 족보를 가지고 핏줄을 소중히 여겼는데, 다른 나라에는 족보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 없습니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개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족보가 없습니다. 한민족이 유일하게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돗개도 족보가 있습니다. 좋은 혈통을 가진 진돗개는 족보에 올려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한 족보를 가진 개 주인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핏줄이 섞일까봐 조심하는 것입니다. 개를 놓고도 그러는데 사람이 핏줄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정말 소중히 지켜야 할 혈통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족보와 혈통을 소중히 여겨온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인류의 핏줄을 바로잡는 새 가정 이상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한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입니다. 탕감복귀섭리는 복잡하면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어서 민족마다 언어가 다릅니다. 만일 거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면 소수민족을 수습하다가 일생을 다 보내버릴 것입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심정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실 민족은 단일민족이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다가 붙잡혀서 최초로 순교를 당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돌더미에 묻혀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운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장 60절)라고 기도하며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지만 당신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이 없었습니다.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를 전부 사탄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나라가 있어야 당신의 자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한민족의 제일 큰 한이 나라를 갖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930여 차례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한 민족은 나라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 가서 400년 간 고역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없는 서러움 속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유로운 조국을 원했습니다. 조국을 찾기 위해서 400년 간 고역살이를 하고 가나안 땅에 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그 나라는 사막 한 가운데 나무도 심을 수 없는 돌덩이 같은 산뿐입니다.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발달했는데도 그 정도인데 지금부터 3500년 전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째서 그런 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하면서 그 곳에서 살기를 소망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애급에서 데리고 나왔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땅이 있어야 하는데, 좋은 곳은 전부 사탄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사탄이 관심도 없고 생각지도 않는 사막지대, 돌무덤 같은 곳으로 데려가서 그곳에다 메시아를 보낼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하나님의 소망은 조국 광복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하나님의 조국으로 화합할 수 있는 소망의 때가 옵니다. 그래서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조국에 소망을 두고, 조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수없이 느끼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