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후편 - 제9장 재림론 -

2013. 1. 6. 20:00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제9장 재림론

 

한국은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동양 3국 가운데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조건만 가지고는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국만을 위한 주님이 아니고 세계 인류와 역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만민이 확인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갖춘 나라에 찾아오십니다.


 

                                서론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를 창조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창조이상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섭리를 하신 것이 인류역사이고 복귀섭리역사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창조이상을 이루지 못한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후아담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 만나는 것을 소망해 왔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세 번째 아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3차로 완성되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세 번째 아담을 중심으로 반드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가 지상과 천상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 곧 재림주는 기독교에서만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불교에도 미륵불(彌勒佛) 신앙이 있어서 나름의 준비를 하며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미륵불은 불교의 재림부처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를 존경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신앙자들이 신공자(新孔子)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공자는 재림공자일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마다 재림을 소망하고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주와 미륵불과 신공자가 각각 따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모든 재림의 신앙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하나님의 아들 한 분에게 귀결됩니다. 그 분을 중심해서 새로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편성하기 때문에 인류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림주를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종교를 통일할 수 있고, 모든 사상을 통일할 수 있는 중심된 지도자를 기다리는 것이며, 인류의 참된 부모가 되는 소망의 중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재림주님은 어떻게·언제·어디로 오실 것인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1. 재림주는 어떻게 오시는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는 성령 강림이 곧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생각이고, 둘째는 영체(靈體)로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구름을 타고 재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이견은 결국 ‘예수님의 직접적인 재림이냐, 사명적인 재림 곧 제3 아담의 출현이냐?’ 하는 문제로 압축됩니다.

 

        1) 성령의 강림이 재림인가?

 

성령의 강림을 예수님의 재림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사도행전 8장 15~19절). 그런데 예수님과 성령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이미 그때 예수님이 재림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지만, 이후에도 성도들이 줄곧 주님의 재림을 고대해 온 것으로 보아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영적 지도를 받거나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는 사람은 ‘내게 주님이 오셨구나.’라고 느끼며 그것이 재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뜻하시는 재림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영체로 재림하시는가?         

 

두 번째는 예수님의 영체(靈體)가 성도와 함께하고 성도를 지도하는 것을 재림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체가 이 땅의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 재림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 역시 재림의 근본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 영체로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사람은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갔을 때도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자,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장 2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체가 나타난 것을 재림이라고 한다면 여러 차례 나타났던 예수님은 이미 재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하셨고, 또 사도 요한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한 것을 볼 때 영체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재림주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 있고, 육체로 오신다는 예언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0절을 보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오신다면 누구든지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2서 1장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2장 5절을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장차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주님은 반드시 여인을 통해 태어나야 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예언과 육체로 오신다는 양면의 예언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성서관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 성서의 예언과 예수님의 출현                  

 

서로 다른 성서관은 기독교인들에게 갈등과 분쟁의 실마리가 되고, 교파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참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참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종래와 다른 관점에서 성서의 면밀한 관찰과 함께 역사적인 통찰이 필요합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메시아가 오시는 날을 말하는데,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먼저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엘리야 선지자는 남북왕조 분립시대에 남조 유다에서 태어난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을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 초림(初臨) 당시에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0절부터 13절을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비로소 예수님의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11절부터 13절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앞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마태복음 11장 2~3절),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태복음 11장 14절)고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과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세례 요한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외형을 가지고 두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이종간(姨從間)인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훌륭한 신앙자였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형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그런 세례 요한을 얼마나 위대하게 봤는지 누가복음 3장 15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인가 심중에 의논하니···’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 한마디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믿고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라한 예수님 앞에 그렇게 위대한 엘리야를 세워 그가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전체를 하나 되도록 하고 민족을 한꺼번에 수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더라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 민족은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 신앙의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 사가랴 집안의 아들로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한 위대한 신앙인이었고, 예수님은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니 두 사람 다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가서 ‘네가 누구냐?’(요한복음 1장 19절)고 물었습니다.

 

그때 만일 세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하고 고백했으면 다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은 유대의 왕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로 출발했을 것인데, 세례 요한은 그만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요한복음 1장 21절)하고 부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네가 그 선지자냐.’(요한복음 1장 21절)고 묻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한복음 1장 23절)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요한복음 1장 25절)고 물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로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한복음 1장 26~27절)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며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비교해 볼 때 유대 민족에게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이 훨씬 훌륭하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했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은 세례 요한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배신하고 대제사장·서기관·율법사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재림을 놓고 유대교인과 예수님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다시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어떤 새로운 인물이 한 여인을 통해 탄생했다고 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했으므로 구약의 엘리야와 다시오는 엘리야를 동일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 한 여인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인물이 엘리야의 사명을 하러 온다고 보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다른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유대교인과 예수님의 엘리야 재림에 대한 성서 해석법이 달랐는데, 오늘 우리 시대의 재림을 놓고 볼 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주 큽니다.

 

사도행전 1장 9절 이하를 보면, 십자가 죽음 이후 예수님이 부활하여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이르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장 11절)고 하면서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구름을 타고 승천한 예수님처럼 재림주가 다시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구름을 타고 오실 줄 알고 있던 유대교인들과 똑같이 성서를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약에도 메시아에 대한 두 가지 예언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는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7장 14절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며 예수님이 오실 때 여인을 통해 육신을 쓰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유명한 예언가요 대선지자입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실 때 구름을 타고 온다고 예언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육신을 쓰고 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2) 성서적으로 본 재림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다시 오실 재림주님을 뜻합니다.

 

반면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요한계시록인데도 이 두 구절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재림주에 대한 양면의 예언은 예수님 때인 2000년 전과 똑같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지 않고 육신을 쓰고 왔듯이 재림주도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오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은 재림주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성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은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또 누가복음 17장 21절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고, 누가복음 17장 23절에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아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셨다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던 사람들도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누구나 다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구름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해석이 안 되는 구절입니다. 재림주님은 육신을 쓰고 오시므로 누가 주님인지 모른다는 말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말세에는 영통을 하여 자기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대혼란이 벌어지기 때문에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5절을 보면, 메시아가 먼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으리라 했고, 그 다음 26절에는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서의 많은 부분이 문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온다면 해석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천국에 가지 주님만 부르면서 쫓아다닌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독실한 신앙인 중에는 아예 그 날을 위해서 성전에서 자고, 먹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이 많은데, 끝날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는 성도들은 많지만 육신을 쓰고 온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3) 원리적 근거로 본 재림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와야 하는지, 육신을 쓰고 와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리를 통해 규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영(靈)과 육(肉) 양면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영육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영과 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을 영육으로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영적으로 부활하셔서 영적인 구원의 길만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은 개척했지만, 육적 구원의 길은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하나님이 주신 수명을 다했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시고 뜻을 이루라고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서 길렀는데, 그들이 몰라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메시아가 구름 타고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시지 않고, 육신 쓰고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에 육신을 쓰고 오시는 것입니다.

 

구름의 의미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놓고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 성서에서 양면으로 예언한 재림의 실상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볼 때 물이 증발하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은 물보다 더 깨끗합니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물을 타락한 인간에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물은 타락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성도가 됩니다. 깨끗하지 못한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그 수증기가 모여서 깨끗한 구름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물이 증발해서 생긴 깨끗한 구름과 타락하여 더러운 세상으로 추락했다가 구원을 받아 선한 본성을 되찾은 성도는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구름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에 비유합니다.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비유할 때 ‘사람이 구름같이 무였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한 곳에 많이 모인 사람들을 구름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뜻은 준비된 성도들을 통해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아무데나 보낼 수 없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워서 그 기대가 이루어지면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말을 성경에서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사람들이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준비된 성도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의 의미                 

사도행전 1장 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다가 하늘로 승천할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어찌하여’는 책망하는 말입니다. 또 ‘너희 가운데 들려 올라 가신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앞 내용은 쏙 빼버리고 뒤의 구절만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늘로 승천하시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믿어왔습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첫 번째는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들려 올라가신 예수님이 본 그대로 오리라는 말은 지금 구름 타고 올라가는 현재진행을 보지 말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전생애노정을 보라는 것입니다.

 

전 생애를 보면, 예수님의 일생은 비참했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고, 아기 때 애급으로 피난을 가고, 열두 살 때 복음을 전파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30세가 될 때까지 뜻을 펴지 못하고 꽃다운 젊은 청년 기간을 목수인 아버지 요셉의 조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리고 30세에 집을 나와 3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강림해서 그들의 신앙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역사의 열기를 가지고 로마로 전도를 나갔습니다. 전도하다가 붙잡히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때 만일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2000년 이후에 어느 여인의 몸을 통해서 다시 온다.”고 했다면 누가 그 고난의 길을 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기독교의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이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요, 인류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한 이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전도하다가 붙잡히면 로마 광장으로 끌려가 며칠씩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살아 계실 때 주님을 불신했지만 주님이 오늘이라도 구름을 타고 오실지 모르니 주님을 배신하지 말고 기다리자.’는 믿음을 더욱 굳세게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가지고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구름타고 온다고 했는데도 영계를 알고 신령해지면 자기가 주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자기가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만 봐도 한 달에 몇 명씩 자기가 주님이라고 적은 전단을 전봇대에 붙여놓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데 적그리스도(敵Christ)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대혼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저기 가보고, 왔다갔다 하다가 자기의 일생과 가문을 망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영을 물 붓듯 부어준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했듯이 남녀노소 모두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6000년에 걸쳐 지상에 왔다 간 영계의 모든 영인들이 지상에 총출동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이 벌어지겠습니까?

 

영적으로 벌어진 혼란은 오직 영적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진리와 영적 지도자만이 막을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어떤 신령한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놓더라도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를 따라갈 것이냐를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을 가지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은 인정하되, 하나님을 향해가는 길을 포기하고 따라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은 대개 말로가 좋지 않습니다. 영계를 통할 때는 정성을 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한 영계가 동원됩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사람들이 따르면 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면 선한 영인들이 역사하지 않고, 악한 영인들이 역사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 줄 알고 믿다가 멸망의 길로 가기 쉽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서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