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후편 - 제3장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2

2013. 1. 6. 20:25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실체기대                

 

(1) 중심인물 : 함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은 노아의 둘째아들 함입니다. 실체기대는 실체헌제를 말하는데, 그 조건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입니다. 조건물이 아니고 조건입니다.

셈은 차자 함의 형이기 때문에 함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애중굴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듯이 셈도 함을 통해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심정과 일체를 이뤄야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아버지 노아입니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 믿음을 세우고, 그 믿음을 차자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아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함은 노아가 120년 간 닦았던 믿음을 계승해야 실체기대의 중심인물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 둘째아들 아벨이 아버지를 대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가정에서도 차자인 함이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아버지의 것을 계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정은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세웠기 때문에 함은 아버지인 노아의 믿음을 계승해야 합니다. 노아의 믿음을 계승하는 방법은 노아와 심정적으로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이 광경을 보고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알려서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쳐서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창세기 9장 20~23절).

 

인간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대단히 잘한 일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서 깨어 옷이 덮어진 것을 보고 둘째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창세기 9장 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는 노아의 저주가 나옵니다. 옷을 벗고 있는 것을 보기가 민망해서 덮어 준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잘한 일인데, 그렇게 저주한 데에는 어떤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누웠던 것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이 있어서입니다.

 

노아가정은 아담가정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가정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2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서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벗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렸다는 것은 타락을 반증하는 행위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린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벌거벗고 있는 자리에서 함이 하나님 편에 서느냐, 사탄 편에 서느냐가 결정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은 노아와 심정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가 벗고 있을 때 함도 자신이 벗고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이 부끄러움을 느껴 하체를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듯이 함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 아버지를 가려줬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타락한 후손입니다.’하는 자증(自證)입니다.

 

이미 홍수심판으로 사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노아가정만 남았습니다. 사탄이 노아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이 아버지의 벗을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자 사탄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함의 행동을 보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이 사탄에게 침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사탄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는데, 함이 순식간에 실수함으로써 그 정성의 기반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함이 노아와 심정일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체기대는 실패했습니다.

 

(2) 부끄러움이 죄가 된 이유                 

 

죄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사탄과 수수작용을 하여 천법(天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을 심히 부끄러워했습니다. 함이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사탄에게 ‘너는 나의 후손이다.’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함의 입장에서는 ‘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하고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은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하고,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 또한 실패했습니다.

노아 이후부터 인간의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읍과 탑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고 인간의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일에 손발이 맞지 않고 혼란을 일으키다가 각각 분열되고 말았습니다(창세기 11장 1~9절).

 

에덴동산의 아담·해와가 완성했으며 아담이 쓰는 말이 인류의 언어가 되고, 아담이 세운 전통이 인류의 전통이 되고, 아담의 문화가 인류의 문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색인종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밖에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백인·흑인·황인종 등 오색인종이 생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의 불통으로 인해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제각각 떨어져 한 곳에만 머물러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는 환경의 일조량에 따라, 태양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인간의 피부 색깔이 달라진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점은 피부색깔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흑인의 피와 백인의 피가 똑같고, 아기 울음소리도 흑인과 백인이 똑같습니다. 슬플 때 눈물 흘리는 것도 똑같고, 기쁠 때 춤을 추는 것도 똑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똑같은데 피부색만 다를 뿐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은 환경게 따라서 환경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곤충들이 보호색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외적으로는 변화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흑인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백인은 코가 높고 콧등이 좁으며 콧구멍이 작습니다. 코는 외부의 공기를 받아들여 폐로 전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구조나 모양이 외기의 온도에 대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흑인이 많이 사는 아프리카는 외기의 온도가 인체의 온도와 비슷합니다. 외기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흑인들은 코가 납작하고 콧구멍이 큽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추운 지방에 사는 백인은 콧등이 높고 그 폭이 좁아서 콧구멍이 작습니다. 추운지방의 사람들은 코가 길어서 터널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찬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건강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자기 체온에 맞게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색인종이 하나 된다는 말은 피부색이 하나된다는 말이 아니라, 타락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혈통이 본래의 혈통으로 돌아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3) 결과                   

 

노아가정은 믿음의 기대는 성공했으나 실체기대는 함의 실수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정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세울 때까지 400년 간 연장됩니다.

 

                    2. 노아가정이 보여주는 교훈

 

노아가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원리적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인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책임분담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책임분담은 상대적 예정이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을 하지 못하면 또 다시 다른 중심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원리적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을 진 사람은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못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섭리가 연장됩니다.

노아가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절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말라.’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모르면 고민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지 않았으면,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길을 가는 사람의 태도는 온유겸손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때를 기다려야 하니까 인내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순간은 내 일생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순간적으로 실수하면 내 일생의 소망도,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생활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순간을 승리하면 내 일생도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도 승리합니다. 이것이 노아가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