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후편 - 제3장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1

2013. 1. 6. 20:26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제3장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노아가정도 아담가정처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론

 

복귀섭리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해서메시아를 보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사탄을 쫓아낼 수 없고 원죄도 청산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야 인간의 원죄를 청산할 수 있고 사탄을 분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소원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맞기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나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의 터전 위에서 아벨 대신 셋을 세우셨습니다(창세기 4장 25절).

 

하나님은 셋의 후손 가운데 노아를 택하시어 아담가정 대신 세우고 새로운 복귀섭리를 펼치십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악주권을 멸하고 하나님이 치리하시는 선주권의 새역사를 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때가 말세입니다.

 

창세기 6장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을 하신 것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였습니다.

 

                    1. 메시아를 위한 기대

 

노아가정도 아담가정처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시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반드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한 인간이 오신 메시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이 본연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하고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아담·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아담과 해와가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공식적인 노정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종적인 노정이 믿음의 기대이고, 횡적으로 이루어야 할 노정이 실체기대입니다.

 

종적인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횡적인 실체기대는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1장 17절)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켜서 절대성을 완성하면 아담과 해와는 종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고, 횡적으로는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게 됩니다.

 

노아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중심인물은 노아입니다. 조건물은 상징물을 말하는데, 방주가 그 조건물이 됩니다. 기간은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40일 동안 홍수심판을 받고 나서 비둘기를 7일 간격으로 세 번 내보내고, 40일이 지난 후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기간, 곧 120년·40일·21일·40일의 기간입니다. 그것으로 믿음의 기대 중심인물로서의 노아를 중심한 섭리가 세워지게 됩니다.

 

노아는 제1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원래 제1의 믿음의 조상은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아담은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믿음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믿음입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가 흘렀습니다. 10수(十數)는 완전수(完全數)이고 귀일수(歸一數)이기 때문에 10대를 거쳤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창조목적이 아담의 타락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0수를 중심하여 섭리하기 때문에 10대째에 타락하지 않은 입장에서 노아를 부른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아벨을 대신하여 섭리의 중심으로 선택한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은 방주인데 방주는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합니다.

 

(1) 방주의 뜻                 

 

하나님은 천주(天宙)를 지어놓고 천주의 중심에 아담을 세웠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천주도 완성됩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천주가 다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천주를 축소한 방주를 짓게 했습니다. 방주는 신천주를 상징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의 주인이듯이 하나님은 신천주의 주인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3층으로 지었습니다. 방주 3층은 아담가정에서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해야 할 성장과정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 아내와 세 아들과 자부(子婦)들, 여덟 식구만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는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여덟 식구를 대신하고 전 인류를 상징합니다. 아담가정도 아담·해와와 세 아들 부부, 이렇게 여덟 식구입니다.

그리고 동물을 암수 한 쌍씩 태웠습니다. 그것은 만물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볼 때 노아가정에서 믿음의 기대의 조건물인 방주는 신천주를 상징합니다.

 

(2) 40일 홍수심판

 

노아가정은 40일 동안 홍수심판을 받았는데, 홍수심판은 선악을 분립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선악의 모체가 된 아담의 두 아들을 놓고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것처럼 노아 때에도 신천주를 상징하는 방주를 지어놓고 전 인류를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랐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여덟 식구는 하나님 편이고, 방주 밖의 인류는 사탄 편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에 하늘에서 비가 40주야 동안 쏟아졌습니다(창세기 7장 7~12절). 홍수심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40일 홍수심판 이후, 40수는 탕감복귀섭리 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꼭 필요한 수가 되었습니다. 40일 금식을 한다든가, 40일 동안 냉수목욕을 한다든가, 40일 동안 경배를 한다든가, 전부 사탄분립수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홍수심판 40일,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애급고역 400년,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등도 사탄을 분립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서 석판을 받습니다. 또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했는데, 실패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사울 왕·다윗 왕·솔로몬 왕 각각 40년씩 120년 동안 통일왕국시대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40일 동안 금식을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신 뒤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서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놓고 재교육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섭리를 출발하기에 앞서 이처럼 사탄을 분립하기 위해 반드시 40수를 세워 섭리하십니다.

 

홍수심판 40일 기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직후와 같은 혼돈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첫째 날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빛과 어둠으로 나누었다(창세기 1장 2~4절)고 했는데, 노아가 방주를 지은 후 40일 홍수심판 기간은 천지창조 후의 혼돈 기간을 의미합니다. 첫째 날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빛과 어둠을 갈라 세웠듯이 홍수심판으로 천지가 혼돈한 가운데서 인류가 하나님 편과 사탄 편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3) 홍수심판 후 행사           

 

방주를 중심한 홍수심판 후에 벌어진 일들은 천지창조 후 전 역사노정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무려 120년 간 배(방주)를 지었습니다.

 

창세기 7장 1절에서 4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식솔들이 방주에 들어간 7일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주야로 40일 동안 쏟아져 내렸습니다(창세기 7장 10~11절).

주야로 40일 홍수심판이 있은 뒤 비가 멎고 방주가 150일 동안 떠다니다가 아라랏산에 멈췄습니다. 그때부터 40일이 지난 다음에 노아는 까마귀를 세상에 내보냅니다. 밖으로 나간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날아서 방주 주위를 왕래했습니다(창세기 8장 6~8절).

 

까마귀가 방주를 돈 것은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이 해와의 사랑을 노리고, 사탄이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노린 것과 같은 입장입니다. 까마귀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과 상대한 세상이 모두 쓰러졌기 때문에 사탄이 발붙일 곳은 노아가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심판 후 사탄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노아가정에 들어갈 조건을 찾아 방주를 살펴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장이 사탄이 되었기 때문에 천사장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장을 복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상징한 까마귀가 방주 주위를 돌더라도 쫓아버리지 못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다음에 노아는 7일 간격으로 비둘기를 세 번 내보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40일 동안 홍수심판이 일어났고, 그 후 방주는 150일을 떠다녔습니다. 또 40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보내고,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를 내보낸 것은 외면상으로는 땅에 물이 말랐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천지창조 후에 전개되는 섭리역사가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비둘기는 에덴동산의 아담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창조이상을 이루려고 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아담을 상징한 비둘기는 방주 밖에서 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그 비둘기를 쫓아버리지 않고 다시 방주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담은 타락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아담을 통해서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뜻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차로 내보냈던 비둘기가 돌아왔을 때 받아들인 것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뜻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7일 후에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2차 비둘기는 후아담인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2차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이미 예정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살아서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내보낼 때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방주 밖은 아직 비둘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왔다는 말은 지금은 살 수 없으나 다음에는 반드시 살 수 있다는 예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예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2000년 간 준비했습니다. 2000년 간 준비한 터전 위에 유대 민족을 세우고, 유대교를 만들고, 교법사와 율법사를 준비한 뒤, 사가랴 대제사장 가정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을 보내고, 요셉가정과 마리아를 중심해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해서 메시아를 보냈는데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불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만들어 놓았지만 인간들이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2차로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다시 돌아왔다는 말은 환경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다음 번에는 반드시 살 수 있다는 예시였습니다. 2차 비둘기는 예수님이 장차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시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7일 후에 또다시 세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세 번째 비둘기는 3차 아담, 곧 재림주님을 상징합니다. 3차로 내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재림주가 오면 반드시 뜻이 지상과 천상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노아는 그런 행사를 치르고 방주를 중심해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