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향기 속에 숨은 무서운 진실

2012. 4. 11. 15:56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한겨레신문-

과학향기

 

매년 4월 5일은 ‘식목일’이다. 이 날만큼은 전국 곳곳에서 나무 심기 행사가 열린다. 인류가 지구라는 땅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나무를 비롯한 식물과 공존해야 한다. 때문에 식물을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식물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인한 생명체다.

 

식물은 동물처럼 직접적으로 으르렁댈 수 없는 대신 뿌리나 잎줄기에서 나름대로 해로운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이 화학물질은 이웃해 있는 다른 식물(같은 종이나 다른 종 모두)의 생장이나 발생(발아), 번식을 억제한다. 이런 생물현상을 알레로파시(allelopathy)라 하며 우리 말로는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한다. 그리스 어로 ‘alle’는 ‘서로/상호(mutual)’, ‘pathy’는 ‘해로운(harm)’을 의미한다.

 

보통 고등식물 말고도 조류(algae), 세균, 곰팡이들이 내놓는 화학물질을 타감물질(allelochemicals)이라 한다. 이 본바탕은 에틸렌(ethylene), 알칼로이드(alkaloid), 불포화 락톤(unsaturated lactone), 페놀(phenol) 및 그 유도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푸른곰팡이들이 분비하는 화학물질인 페니실린이 다른 세균들을 죽이는 것도 타감작용의 한 예다.

식물들이 타감물질과 관계없이 단순히 양분이나 물, 햇빛을 놓고 다툴 땐 타감현상이라고 하지 않고 ‘자원경쟁’ 정도로 구분해 설명한다. 밭에 심은 채소들이 띄엄띄엄 나 있으면 바랭이나 비름 따위의 잡초가 쳐들어오지만, 촘촘히 난 열무나 들깨밭에는 잡초가 자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촘촘하게 심어놓은 열무를 마냥 그대로 두면 튼실한 것이 부실한 것들을 서슴없이 짓눌러버리고 몇 놈만 득세해 성세를 누린다.

 

먹이와 공간을 더 차지하려고 약육강식, 생존경쟁이 불길 같다. 동물들도 하나같이 넓은 공간을 차지해 많은 먹이를 얻고, 여러 짝과 짝짓기를 해 많은 자손과 더 좋은 씨를 받고자 죽기 살기로 으르렁댄다.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푸른곰팡이부터 잔디밭의 클로버까지, 타감물질을 분비하지 않는 식물은 없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타감작용을 살펴보자. 소나무는 뿌리에서 갈로탄닌(gallotannin)이라는 타감물질을 분비해 거목 아래에 다른 식물은 물론이고 제 새끼 애솔마저 거의 살 수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는 관목(떨기나무)의 일종인 살비아(Salvia leucophylla)는 휘발성 터펜스(volatile terpenes)를, 북미의 검은 호두나무(black walnut)는 주글론(juglone)을, 유칼립투스(eucalyptus, 유칼리나무)는 유카립톨(eucalyptol)을 식물체나 낙엽, 뿌리에서 뿜어내 토양 미생물이나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밖에 다양한 식물들이 타감물질을 분비한다. 한마디로 식물 중 타감물질을 분비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잔디밭 한구석의 토끼풀이 잔디와 끈질기게 싸우면서 삶터를 넓혀가는 것도 클로버가 분비한 타감물질인 화약(火藥) 탓이다.

 

상쾌한 향기로 인해 흔히 실내에서 많이 키우는 허브(herb, 푸른 풀이라는 뜻)나 제라늄(geranium)과 같은 풀도 타감작용을 한다. 평소에 가만히 두면 아무런 향이 나지 않지만 강한 바람이 불거나 인위적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별안간 역한(?) 냄새를 풍겨낸다. 침입자를 재빠르게 쫓아내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그 냄새를 좋아하지만 실은 ‘스컹크’가 내뿜는 악취 나는 화학물질과 다르지 않다. 감자 싹에 들어 있는 솔라닌(solanine)의 독성이나 마늘의 항균성 물질인 알리신(allicin)도 말할 것 업이 모두 제 몸을 보호하는 물질이다. 어느 식물이든 자기방어 물질을 내지 않는 것이 없다.

 

병원균에 대한 식물의 방어 과정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병원균이 식물의 세포벽에 납작 달라붙어 유전물질(DNA)이나 효소를 끼워 넣는 날이면, 빛의 속도로 체관을 통해 비상 신호물질을 온 세포에 흘려보낸다. 상처부위는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물질을 유도해 세포벽 단백질의 용해를 막으면서 세포벽에 딱딱한 리그닌(Lignin) 물질을 층층이 쌓는다. 파이토알렉신(phytoalexine)과 같은 항생물질까지 생성한다.

 

이렇듯 식물은 화학물질로 말을 한다. 나방의 애벌레인 송충이는 솔잎을, 배추흰나비 유충인 배추벌레는 배춧잎을 갉아먹으며 산다. 그런데 벌레들이 달려든다고 나무와 풀이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일단 벌레들의 공격을 받은 소나무나 배추는 서둘러 상처부위에서 테르펜(terpene)이나 세키테르펜(sequiterpene)과 같은 휘발성 화학물질을 훅훅 풍겨낸다. 이 신호물질의 냄새를 맡은 말벌들은 이게 무슨 향긴가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뿐만 아니라 말벌은 유충의 침과 똥에서 나는 카이로몬(kairomone)이라는 향내를 맡고 유충을 낚아채기도 한다. 즉, 소나무와 배추는 자기를 죽이려 드는 천적을 어서 잡아가 달라고 말벌에게 일종의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남미에 자생하는 콩과식물의 일종에는 항상 진딧물이 들끓는다. 그런데 느닷없이 메뚜기 떼가 달려들어 이 식물의 부아를 돋우면 개미에게 ‘어서 와’ 하고 연거푸 메시지를 날린다. 개미는 진딧물의 분비물을 먹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받으면 식물 쪽으로 달려온다. 억센 개미들이 들끓으면 메뚜기가 도망간다는 것을 콩 식물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적이 달려들면 이내 이파리의 맛을 떨어뜨리거나 움츠려 시들어버리는 내숭을 떠는 식물들도 있다.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쓰는 것이다. 식물은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서 살아온 대단한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글 : 권오길 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