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하나님 - 제4장 해방해 드려야 할 하나님_1절

2013. 3. 6. 15:21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1절 하나님의 한과 복귀섭리

1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지으셨습니다. 닷새 동안에 지은 어떤 것보다도 사람 하나를 위주로 하여서 그의 영광과 소망과 돈독한 심정을 중심삼고 지으셨습니다. 그 인간 하나가 성장하여 소망을 성취함으로써 행복을 노래하고, 평화의 가정을 만들어 하나님과 더불어 있기를 하나님은 바라셨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만들어 놓고 기뻐하시던 하나님, 아담 해와가 자랄 적마다 하나님은 애절한 심정,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의 소망의 승리를 완결지을 수 있는 그때를 고대하셨습니다. 자라는 아담 해와를 앞에 놓고 지으신 창조세계를 바라볼 적마다 ‘너를 위해 지은 만물도 좋거니와 만물을 차지할 너를 바라보는 것이 더 좋구나.’ 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했던 아담 해와, 소망에 어리던 아담 해와,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 또 모든 만물세계에 있어서 그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될 중심존재인 아담 해와, 어느 한 날 타락의 날이 있어서는 안 될 아담 해와, 슬픔의 한 날이 있어서는 안 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담 해와가 한 날 실수함으로써 타락이라는 명사가 초래됐고, 슬픔이라는 명사가 초래됐고, 하나님의 소망 세계에 흑암의 권세가 침범하였다는 사실은 원통하고 분통한 일입니다.


2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인류시조의 슬픔은 마땅한 것이지만, 인류시조를 바라보고 소망을 갖던 하나님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인간이 슬퍼하는 입장에 떨어짐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불쌍한 자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는 이 땅 위에, 천지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이러한 생각이라도 할 수 없었던 일인데 인류시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인간 타락입니다.


 왜 슬픔의 하나님인가

3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념을 중심삼고 사랑의 동산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었던 그 창조의 이상이 좌절되었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천년 역사 속에서 수고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탄과 싸우면서 느끼셨던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아담 해와를 잃어버렸던 그때의 서러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가를 체휼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슬퍼하셨던 그 심정을 도저히 체휼할 길이 없습니다.


4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실 존재입니다. 인간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 되는 것이 창조이념인데, 그 이념은 간 곳 없고 하나님에게는 처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인간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처참한 개인이나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광의 모습이었으나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그 반대의 모습으로 계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녀인 인간에게 맡길 수 있고, 인간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입장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자녀들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고통과 사정을 통고하고 싶지 않고 무한히 애쓰는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5 지금까지 인간은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가운데 계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수많은 종교도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그렇게 알고 신앙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가정, 자신의 자녀, 자신의 재산, 자신의 나라와 세계를 잃어버린 입장에 계십니다. 그런 입장에 계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를 만나면 자기의 모든 한이 해원되고 지금까지 고대하던 전부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길을 찾아 나와 부모를 상봉하고 보니, 그 부모가 갖고 있는 재산은 물론이요 세계와 부모의 모든 것이 원수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은 역사적으로 서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심중에 모시고 슬픈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낙망하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만민과 더불어 천주의 전권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한을 붙들고 위로해 드리며 승리의 한 날을 맞이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심판 대신 축복해 주고 싶다 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남아지는 무리가 됩니다. 모진 환경과 역경에 시달려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심정을 가져야만 비로소 하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정에 인연되어 있으면 아무리 강한 삭풍이나 폭풍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이런 생명력을 가진 심정의 유대를 감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7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영광 받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구원하시느라고 매일 통곡하고 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책임분담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일을 하시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8 하나님은 슬픔의 주인공이요 고통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실 아버지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으나 그런 내용을 가지고 기뻐하거나 영광을 누려 보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타락의 한과 더불어 슬픔과 고통의 내용을 지니신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행복의 동산인 줄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기쁜 내용이 있는가 하고 아무리 샅샅이 뒤져 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영광을 누리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내용만을 가져야 할 하나님에게 기쁨과 영광과 선의 결실, 이상의 요소는 다 없어지고 슬픔과 고통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슬프고 슬픈 일 중에도 이 이상 슬픈 일이 천지간에 없을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제일 슬픈 분입니다. 죽어 가는 자기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우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은 더 슬픈 분입니다. 선을 주장하다가 만민이 공인하는 자리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원통하게 죽는 사람보다도 더 분한 분입니다. 제일 분하고 제일 불쌍한 명사를 가진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실감나게끔 가르쳐야 할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은 영광에 맞추어 입은 옷자락이 아닙니다. 피땀에 절어 있는 옷자락입니다. 그 옷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손으로 붙들겠다고 했다가 못 붙든 피어린 손가락으로 만든 옷자락입니다. 하나님의 발은 가시밭을 헤쳐 나오다 상처를 입은, 수많은 투쟁역사에서 상처를 입은 발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을 세워 개인의 한을 찾다 쓰러질 때에 대신 맞아 나오는 분이요, 한 민족을 세워 여러 민족이 쓰러지게 될 때, 민족이 배반하게 될 때 대신 맞으면서 투쟁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오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쌍한 분입니다.


 불쌍하신 하나님

10 하나님은 연금 상태에 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영원한 독자인 아들딸을 잃어버린 부모의 고통을 품고 사는 하나님입니다. 한의 하나님입니다. 지금까지 눈물을 계속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구원역사를 위해 인간의 뒤를 따라오면서 수없이 죽음을 당하고 별의별 일을 보고도 참고 참은 하나님의 그 가슴에 못이 박혀 있다면 세계를 덮고 남을 수 있는 못이 박혀 있고, 한이 있다면 이 세상에 없는 한을 품고 나온 하나님입니다.


11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지만 그 주인 행사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의 주체이지만 인간을 대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입장에서도 인간을 대하여 ‘너는 내 것이다.’라며 마음대로 취해 보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은 땅 위에 인류가 많이 살고 있지만, 그들을 한 번도 당신의 아들딸, 혹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용자로 세워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 대한 총진격 명령을 할 수 있는 총사령관으로 세워 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세워 천사세계에 명령하여 지상과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땅 위의 인간에게 신부의 이념을 주고 신부를 찾아 헤매었으나 신부라고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죄송한 무리입니다.


12 하나님은 무한히 불쌍한 분입니다. 죄악의 자식을 품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거북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죄악 된 아들딸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오셔서 찢기고 상처 받고 몰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통곡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가 있습니다. 민족이 쓰러지고 새로운 민족이 이루어지는 그때마다 역사의 어느 한 쪽도 제외됨이 없이 하나님의 심정의 곡절이 스며 있다는 것입니다.


13 하나님에게는 한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한이 있습니다. 말 못할 곡절과 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허덕이며 찾아 나오신 하나님은 슬픈 신세입니다. 이 땅 위의 어떤 거지도 하나님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천지만물을 호령해서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된다면 왜 6천년 동안 죄악의 인류를 끌고 나왔겠습니까? 제일 불쌍한 분입니다.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주인 노릇을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 노릇을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은 것이지만 당신 마음대로 못하였고, 당신의 아들딸이지만 아들딸이라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리해 나온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14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제일 수고를 많이 한 수고의 대왕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그날부터 인간을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아버지의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 사시장철은 물론이요 6천년 역사 속에서 잠시라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인간상을 붙들고 뒤넘기치는 신음과 울부짖음을 생활철학으로 알고 그것을 걸고 인간을 가누어 주는 생활을 해 나온 하나님이니 얼마나 불쌍한 분입니까?


15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입니다. 이 슬픈 하나님을 알아 모시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한다면 자기 슬픔과 자기 고통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서 지금까지 찾아 나온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운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 슬픔과 자기 고통까지 다 나타내는 자들은 심판받게 됩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의 하나님에게 차마 자기 고통을 놓고 기도할 수 없어 혼자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주실 것입니다. ‘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십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수고를 제게 맡겨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저 복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은사가 많은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16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눈물짓는 것은 죽음의 길을 일소하고, 고통의 길을 일소하고, 슬픔의 길을 일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을 일소하기 위하여 먼저 눈물짓고 피땀을 흘려 나온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 뜻을 대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자리에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최후의 죽음 자리, 최후의 눈물을 흘릴 자리, 최후의 피땀을 흘릴 자리에 우리 선조들을 내세웠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를 해소하기 위해 하나님도 그 이상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그 순간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아픈 것입니다. 이러한 아픈 심정을 가지고 인류역사 이후 고통을 받아 온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일대를 중심삼고 한번 고통받고 넘어가면 우리로서는 책임이 다 끝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죽음의 길을 갈 적마다, 눈물의 길을 갈 적마다, 피와 땀을 흘리는 길을 갈 적마다, 슬픔과 고통의 길을 갈 적마다 심한 고통을 받아 나왔습니다.


 부모의 자리를 빼앗긴 하나님의 한

17 하나님은 본연적 참부모의 자리에 있는 분입니다. 참부모가 되어야 할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를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창조이상의 본연적 기준에서는 없었던 일이 생겨났습니다. 이 창조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것이 생겨난 것을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간섭할 수도 없고 그것을 책임지고 소화할 수 있는 입장에도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8 하나님은 원수한테 왕좌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 못 되어 설움의 역사를 갖고 계십니다. 자기 나라의 왕으로, 우주의 왕으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이 죽었다고 천대를 받고 계십니다. 결국은 자기 사랑하는 아들딸이 다 겁탈당하고, 완전히 원수의 농락터로서의 지구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19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감옥생활을 하는데 영광을 누리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은 한없이 아픕니다. 또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위해 지은 우주만상까지도 다 사탄의 주관권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참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의 대상을 잃은 순간부터 한없이 외로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능권을 한 번도 주장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못난 타락 인간도 다 자기를 자랑하고 사는데, 하나님은 창조주의 위상을 한 번도 세워 보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면서도 그들 앞에 스스로 지존하심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20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첫째는 참사랑의 이상세계를 잃어버렸고, 둘째는 참사랑의 이상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참사랑의 부부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참사랑의 아들딸, 종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3대 비애입니다.


21 뜻의 완성을 바라 왔던 하나님 시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소망의 자리에 근본적인 파탄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완전히 파괴당하고 유린당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이상 대상권이 파탄당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본질적인 사랑을 지닌 하나님이 이상적 대상으로 그리던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지극히 슬펐을 것입니다. 지극히 지극히 비통했을 것입니다.


22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있는 심판주로서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낸다고 합니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제일 비통하게 몸부림치면서도 광명한 천지가 흑암의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을 극복해서 거기에서 몸을 가누어 눈을 뜨고 의식을 갖추어서, 죽었지만 이 자녀들을 다시 살려 놓겠다는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23 인간과 영원히 같이 있어야 할 하나님이 그 인간과 갈라설 때에 그 비통함과 억울함과 분함과 서러움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인간은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의 기지를 바라 성숙해서 평행선상에서 종횡이 결합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 천지의 모든 만물의 측정 기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인연된 모든 것은 어디서나 다 맞게 되어 있습니다.


24 하나님도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상대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특권적인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허덕이는 무가치한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저들이 본래는 내 사랑과 내 생명과 내 혈통을 통해서 직계 자식이 되어 하늘나라의 승리적 영광을 차지할 것인데, 패자의 탈을 쓰고 신음과 고통과 탄식과 절망 속에서 허덕이다 생명을 끊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렇게 슬픈 하나님입니다.


25 여러분은 자기보다 더 분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위로하게 될 때는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더 비통함을 겪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누구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님 자신이요, 끝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 맺혀 있는 원한을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내정적인 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정을 품고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6천년 전의 슬픔도 역사시대권 내에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제물로 드렸다는 체험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이 시간권의 내용이든지 생활권의 내용이든지 간에 일생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폭과 넓이가 커져 추앙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무한한 근원과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하여 그런 내용을 갖고 실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하신 슬픔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6 우리는 스스로를 내세우며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나긴 역사의 뒤안길에서 참된 나를 말할 수 있는 자식을 찾아 한에 얽힌 복귀섭리를 해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함부로 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이상가정 완성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평화세계, 하나님이 천년만년 기다려 온 이상가정만 세운다면 그곳이 바로 지상천국의 출발지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불쌍한 하나님의 한을 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27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뜻하신 것을 성취하지 않을 수 없고, 하시고자 했던 뜻을 기필코 성사해야 될 분입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해 재생공장에서 수리하여 본연의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타락하지 않은 이상 위에 아담을 다시 만들어 내야 하고 해와를 다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찾아진 부모로 연결시켜서 자녀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구원섭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28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뜻을 향하여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뜻도 하나요, 그 뜻의 길을 향하여 가는 길도 두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직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9 절대적인 하나님은 역사관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그 역사관은 섭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섭리 가운데는 섭리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문화권을 수습해서 하나의 세계로 지향하는 절대적인 신의 이상, 곧 신의 뜻은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신의 뜻, 신이 지향하는 그 목적은 인류를 파탄의 와중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해방과 평화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종착점을 향해서, 통일된 세계를 향해서 역사는 움직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0 너와 나 둘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하고 뜻을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가정, 그럴 수 있는 씨족, 그럴 수 있는 민족, 그럴 수 있는 국가,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런 권내에 내가 포괄되어 살고 있는 입장, 즉 환영하고 호흡하고 주고받는 권내에서 내가 주체적 입장에서 거동하며 산다는 입장에 설 때에 그야말로 통쾌한 일이 아닙니까? 무한한 세계가 뻗어 갈 수 있고, 무한한 세계가 축소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조화의 인연을 제시할 수 있는 나요, 맥박의 기원을 파동시킬 수 있는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통쾌한 자리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어디를 가게 되면 하나님도 따라오십니다. 내가 숨어 버리면 하나님도 곤란합니다. 그럴 수 있는 자각된 자리에서부터 통일의 요인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31 아무리 외적 섭리가 완결된다고 하더라도 내적 섭리가 여기에 동반하여 완결되지 않으면 하나의 전체목적을 완성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원리의 관입니다. 여기에서 내적인 것이 중요하냐, 외적인 것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 중에 내적인 것을 보다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위한 문제이고 외적인 문제는 사람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 더불어 내적으로 하나된 개인을 통해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해서 내적으로 하나된 종족을 이루고, 그 종족을 통해서 내적으로 하나된 민족을 이루며, 그 민족을 통해서 내적으로 하나된 국가를 이루어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32 죄 있는 세상에서 죄 없는 세상으로 옮겨야 되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옮긴다는 것은 구원인데, 곧 복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본래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메시아가 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사탄 마귀 세상의 사람을 다 자기한테로 구해 내는 것이요, 나중에는 사탄 마귀를 추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데에는 죄만 지으면 참소를 하는 사탄 마귀가 있습니다. 이것을 추방해야 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인류를 망치고 인류를 유린하는 사탄 마귀를 이 지구성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3 하나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뜻 성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뜻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하면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 이상 중요한 사항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이상, 즉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은 하나님 자신의 일로만 남아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뜻 성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떠난 상대 입장에 그 성패를 걸어 놓고 문제 되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게만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문제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짓기 전에 천지만물을 지어 놓고 그다음에 아담 해와를 지어 중심 자리에 세워 놓았는데, 그 중심존재가 승리의 결실체가 되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바람이지만, 그렇게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관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34 타락한 부모, 즉 거짓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야 맺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와 내연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창조원칙을 두고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이 지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지은 목적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성의 표준을 세워 놓았던 창조의 법도가 있으므로 이런 인연을 중심삼고 다시 인간이 책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제2차적인 복귀섭리노정입니다. 복귀섭리는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노정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무원리권의 세계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가 없는 세계, 하나님이 간섭하려야 간섭할 수 없는 세계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35 하나님이 주체와 동기가 되지 않고는 인간 자체만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한의 구렁텅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원래 인간은 창조원칙으로 볼 때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가져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떨어진 인간을 다시 아들의 자리로 끌어올리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창조보다 몇 배 이상의 수난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원리권 내로 떨어진 인간을 사다리를 놓아 끌어올리는 역사를 해 나오신 것입니다.


36 하나님은 아담 가정이 타락한 그날부터 아벨을 중심삼고 섭리했습니다. 부모가 잘못함으로써 자녀를 중심삼고 섭리했다는 것입니다. 섭리의 목적은 뜻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 그러면 뜻의 목적이 뭐냐? 창조이상,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조목적 완성은 사랑의 일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가정에 있어서 이 일이 성사 안 됐다는 사실이 타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의 타락이요, 심정의 타락이 성립된 것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이것을 재창조하기 위해서 아벨을 세워서 역사한 것입니다. 아벨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차원과 아벨이 대하고 있는 차원이 일치되어 있느냐? 차원은 다르지만 가는 방향에 있어서, 아벨로서의 개인이 대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전체 뜻 앞에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뜻을 행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대하는 뜻의 입장과 방향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벨은 구원섭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가인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인을 일치화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37 타락한 인류는 아직까지 세계가 입증해 줄 수 있고, 땅이 입증해 줄 수 있으며, 하늘이 입증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생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개인의 생의 가치를 찾고, 개인을 거쳐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찾고, 세계를 넘어 천적인 영원한 생의 가치를 찾아야 할 복귀의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섭리의 뜻을 세워 놓고 전체의 생의 가치를 찾아 나오신 목적은 어디에서 종결될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 한 자체나 세계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동시에 세계가 기쁠 수 있고, 세계가 기쁠 수 있는 동시에 개인이 기쁠 수 있는 생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늘의 구원섭리도 끝나고, 사탄을 중심한 세계적인 인륜도 끝나고, 개인적인 도덕관념도 끝나게 됩니다. 타락한 인류에게는 이러한 생애노정을 개척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38 원죄를 뽑기 위한 싸움은 아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 가정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을 갈라놓고 섭리역사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사랑하게 되어 아벨한테 제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제물을 드릴 때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시해야 됩니다. 사탄이 반대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아벨은 있는 정성을 다하여 환경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뜻에 맞게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아벨은 타락한 아담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응해야 됩니다. 아벨은 사탄과는 영영 관계가 없는,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럼으로써 악한 주권 내에서 해방을 받아 선주권 내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39 하늘과 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고 피조물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귀한 존재, 하나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전체의 성상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새로움의 실체가 주인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날은 언제일 것인가? 이런 감격적이고도 충격적인 한 날을 맞기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이 하나의 목적을 세워 놓으시고 복귀섭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수고로써 역사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40 하나님은 천신만고하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숱한 탕감의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하나님이 악마를 마음대로 쳐부수고 악마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빼앗아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키워,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사랑으로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이루려 하던 본의의 뜻이 있는 한 아담 해와는 타락하였어도 그들이 타락하기 전의 마음을 하나님은 영원히 갖고 계셔야 됩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세계를 떠났지만 이것을 힘을 가지고 강제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미 악마와 사랑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으면 소유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상속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동거권·동위권·동참권이 결정됨으로써 완전히 사탄의 소유권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1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기쁜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고, 인류시조가 기쁜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고,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 지음 받았던 만물도 기쁜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인들이 슬픈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서 기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인류시조가 슬픈 자리에 떨어져 내려감으로써 만물도 슬픈 운명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만물이 탄식한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의 탄식도 탄식이지만 인류도 탄식합니다. 인류도 탄식하지만 만물과 인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선 하나님도 탄식권 내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슬픔의 역사를 돌이켜 기쁨의 역사로 복귀,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본연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

42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고하시며 섭리해 오신 것은 오직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뜻의 귀일점을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인간과 하나님이 동고동락할 수 있는 데에 두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뜻을 성취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동고동락할 수 있는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참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곧 인간의 뜻이 되며, 인간은 온 피조만물과도 화동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인자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이 오기를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은 바라고 있습니다. 뜻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이요,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도 영원한 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이 이뤄지면 하나님과 인간이 일체가 되어 하나님이 즐거우면 인간도 즐겁고, 인간이 즐거우면 하나님도 즐겁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이 되어 둘이 아닌 하나로 화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에게 영원한 이상의 즐거움을 돌려드리고, 또 자신도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43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은 직계 자녀로 구성된 가정을 위주로 하여 종족이 편성되고, 국가가 이루어지고, 세계가 이루어졌더라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요,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나라요,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가정이요,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개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개인에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 이렇게 전체가 하나님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역사요 타락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면 하나님이 창건하시려는 창조이상의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본래 의도하셨던 창조이상을 실현시켜야만 하나님 본래의 권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표준 해서 악한 세계를 수습해 본래 이상 하셨던 본연의 세계로 이끌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44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만물과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종의 자리로부터 시작하여 양자의 자리를 거쳐 자녀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는 일을 해오셨습니다. 그것은 한스러운 타락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만물과 인간과 하나님이 일체의 인연을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의 기쁨이요, 인간의 기쁨이 만물의 기쁨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을 만물세계와 천사세계에까지 자랑하고 보여 주고 위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창조 당시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성품이 있기에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서로 자랑하고 싶고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고, 인간은 자기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주고받는 기쁨입니다.


45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끌어올리는 역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협력하면 복귀섭리는 쉬울 터인데 지금까지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에까지 뜻을 넓혀 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적 외적으로 받으신 고충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국가나 민족도 평면적으로는 고생을 했노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고생했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상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왔다 간 모든 인간을 다 총합해 봐도 뜻을 위해 수고하고 협조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끌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책임지고 친히 수고하시며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46 수많은 인류를 놓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셨습니다. 6천년 동안 수고해 오셨는데 말세라고 하는 이때, 끝날은 어떤 때냐? 이 세계상에는 본연의 종으로 살 수 있는 무리가 있고, 본연의 양자와 같은 무리가 있고, 본연의 자녀와 같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 자녀와 같은 무리가 태어난 기반 위에 본연의 부모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상에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가 나타나야 됩니다. 어린양잔치는 이 지구상에 인류가 잃어버렸던 본연의 우리 집을 비로소 건설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집을 건설하려면 거기에는 부모가 있어야 되고 형제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자녀가 번식됨으로써 본연의 종족이 벌어지고, 본연의 민족이 벌어지고, 본연의 국가가 벌어지고, 본연의 세계가 벌어져서 비로소 지금까지의 악한 세계를 청산하고 선의 세계를 향하여 섭리해 나오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47 타락함으로써 원리권 내가 아닌 무원리권에 떨어졌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종인데 어느 정도 떨어졌느냐? 천사세계, 종보다도 더 나쁜 세계에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되어야 할, 왕자 왕녀가 되어야 할 입장에서 종보다도 나쁜 자리에 떨어졌으니 다시 올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종의 종으로부터 종·양자·서자·직계 자녀의 자리까지, 그다음에 어머니를 통하여 아버지의 자리에 돌아가야 됩니다. 복귀입니다. 구원섭리는 병나기 전의 기준으로 다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8 하나님은 타락으로 더럽혀진 땅을 다시 회복하시려고 남아진 천사들을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맺는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타락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반한 입장에 서 있는 인간, 만물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지없이 떨어진 인간을 하나님이 다시 대하시기 위하여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지배하고 사탄이 참소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위하여 다리를 놓아서 역사해 나오신 것이 구약시대를 거치고 신약시대를 거쳐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49 하나님이 수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하시면서 수난길을 거쳐 온 것은 하나님이 마음이 좋아서 참고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류역사 수만년 동안 구원섭리를 해 나오면서도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길을 찾아 나오기 때문이요, 사랑의 아들딸을 찾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천년을 하루와 같이 그 수난길을 넘고 넘을 수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50 하나님은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참사랑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구원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중심삼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역사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되었는데 지금도 투입하고 있습니다. 어느 단체를 통하거나 어느 누구를 통해서라도 투입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타락한 이 우주를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본질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하셨던 참사랑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입하던 본연적 기준을 영원히 계속하지 않고는 절대자인 하나님의 권위를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51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서도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다.’라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52 자식은 자기의 피 살을 이어받은 아들딸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통하여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동할 수 있는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합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우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에서부터 백, 천, 만까지 위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었다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53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이 땅 위에는 고통과 슬픔과 비참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조 당시에 하나님이 계획한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런 세상을 원치 않았고, 인간도 이런 세상에 태어나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비참한 역사, 슬프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본래에 소망하였던 평화의 세계, 행복의 세계, 자유의 세계, 선의 세계를 되찾기 위한 목적을 세워 놓고 이 타락된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귀의 길이요 구원섭리의 길입니다.


 종교를 세운 이유

54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과 복귀의 인연을 맺어 잃어버렸던 이상의 동산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여 옛날에 타락하지 아니한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기쁨의 동산을 건설하고 하늘의 기쁨을 기점으로 하여 세계적인 이념을 창건하기 위해 섭리하시는 역사가 구원섭리역사요, 우리가 걸어 나가야 할 복귀역사입니다. 따라서 복귀의 노정을 걷고 있는 여러분이 자기 한 자체를 천륜의 노정 앞에 냉정히 세워 놓고 비판해 보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어떠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위치와 방향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을 대표하는 종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란 명사를 세워 역사과정에 종교를 중심삼고 인간을 찾아 나오고 계십니다.


55 따먹지 않고 타락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권 내에서 결혼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받고 하나님의 생명과 혈통을 이어받아 직계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수양이 필요 없습니다. 직계는 마음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체가 되어서 다 통합니다. 몸 마음이 싸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 안 되면 여러분이 천상세계에 가서도 억만년을 두고 하나 만들어야 됩니다. 참사랑을 중심삼고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참사랑의 도리를 가르치는 그 대표자가 참부모님입니다. 모든 역사적인 죄를 뽑아 버릴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비로소 해방이 벌어집니다.


56 종교는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인간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이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타락한 인류세계는 아직까지 하나님 뜻의 완성시대를 못 봤고, 오늘날 인간의 뜻의 완성시대를 못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이상세계를 향하여, 보다 차원 높은 본연의 땅을 향하여 추구해 나온 것입니다. 그 추구하는 목적은 결국 인간의 뜻으로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데에서부터 인간 뜻의 출발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보는 섭리사적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아담 완성과 해와 완성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영계 완성입니다. 천사세계의 완성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해 나왔습니다.


57 하나님의 뜻의 완성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조건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 조건도 아닙니다. 권력 조건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조건이냐? 사랑을 중심삼은 완성을 표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은 역사의 배경이 다르고 시대적 차이가 있으니만큼 그 차이에 따라서 이러한 목적을 표준으로 하고 나오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지 자비라든가 사랑의 내용을 갖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아담에 대한 사랑이 아담에게만 미쳐지는 것이 아니요, 해와의 사랑이 해와에게만 미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아담과 해와의 사랑으로, 앞으로 가정·종족·민족·국가, 아담의 후손 전체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의 이상부부로부터 사랑의 이상종족·민족·국가·세계 형성이 가능하게 됩니다.


58 하나님이 세워 나온 종교 가운데는 반드시 주류 종교가 있고, 그다음엔 주류 민족이 있습니다. 주류 민족과 주류 종교를 연결시키고 주류 사상에까지 결부시켜서 하나님의 이상 실현을 경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이상 실현을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그 터전 위에는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민족이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형성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 하나님의 이상을 이어받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가까웠던 종교를 통해서 민족이 편성됩니다. 종교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이상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뜻의 길입니다.


59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살기 시작한 것이 종교의 길이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의 뜻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뜻,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개인천국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은 가정천국의 생활을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민족·국가·세계를 넘어 세계적인 뜻을 중심삼고 세계가 하나되어 살게 되면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천운을 움직이는 섭리 주역

60 뜻의 길은 하나입니다. 뜻이 가는 방향은 둘이 아닙니다. 뜻이 안착할 수 있는 곳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자기의 뜻이라고 정하고 있는 뜻의 방향이 여러 갈래입니다. 뜻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방향도 여러 가지입니다. 또 뜻을 중심삼고 자기가 성공하는 것이나 정착해야 할 이런 모든 것이 다양합니다.


61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의 사랑에 화합하여 살고, 온 하늘땅이 하나님의 사랑을 즐거워하면서 그 사랑을 실제 생명의 중심으로 세운 가운데 전부 하나되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과 관계를 맺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과 관계맺지 못하고 인간에게서 떠나게 되었고, 온 피조세계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시려는 그 사랑을 중심삼고 온 만물을 규합하여 하나님과 만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 한 날을 소망하시면서 지금까지 6천년 역사를 경과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온 피조만상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그 하나님의 이념은 이념대로 남아 있고, 찾아야 할 소망의 사랑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뜻을 기필코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62 우리는 지금 소망 성취의 과정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그 소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여러분은 세웠던 신앙의 약속을 종결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한 자체는 최후의 한때에 주님의 피와 살을 받은 것을 보답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예수님의 전후·좌우·상하, 또 성신의 전후·좌우·상하, 하나님의 전후·좌우·상하를 감히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상의 뜻인 동시에 지상의 뜻인 인간을 통하여 귀결짓는 한계의 날을 땅 위에 세우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뜻도 성사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뜻을 생각하면 오늘날 미미한 우리의 가치는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63 여러분은 6천년 역사의 최후에 남은 하나의 우주적이고 모험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 임무가 우주적이라면 여러분도 상대적으로 우주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모험적인 내적 각오를 갖고 나서야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달리 이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초현실적인 모험의 노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진전되어 나왔습니다. 이런 우주적인 모험의 관문을 거쳐야만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들고 아버지 앞에 호산나의 개가를 부를 수 있으며, 우주적인 신부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어떠한 조건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핍박과 비난이 있을지라도 초현실적인 모험의 기준을 세우는 하늘의 왕자 왕녀가 될 수 있습니다.


64 여러분은 자유 중에서도 최고의 자유, 영광 중에서도 최고의 영광, 기쁨 중에서도 최고의 기쁨의 자리에서 주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벗어나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말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을 찾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기준을 여러분의 생활과정에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당신의 우주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체휼적인 인격의 가치를 지닌 한 사람, 예수님을 대신하고 역사를 대표한 인격의 가치를 지닌 한 사람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찾고, 세계를 찾고, 하늘땅을 찾아 주기를 예수님은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65 하나님이 섭리역사를 거듭해 나오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섭리에 상응하게 함으로써 인간 앞에 이상의 하나님으로 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요 공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상의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서러움을 우리가 대신 체휼하여 하나님과 같은 서러운 입장이 되어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연을 맺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상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수 없고, 또 창조이상의 주인공으로도 나타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상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나아가는 노정에서 이 길을 막고 있는 사탄들과의 싸움의 노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야 할 탕감복귀의 길입니다.


 원리원칙에 따른 구원섭리

66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복귀섭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복귀섭리는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지었던 사람이 깨져 나갔으니 말씀을 통해 재창조하는 일입니다. 재창조되어야 할 인간입니다. 몸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렸고, 심정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말씀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곧 진리를 찾아야 됩니다. 진리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원칙인 동시에 천륜의 근본입니다. 그러기에 세계는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참된 말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참된 말씀이 없으니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된 생명의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없습니다. 참다운 사랑의 실체가 없으니 참다운 우주, 참다운 하늘땅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67 하나님이 복귀섭리역사를 하는데 주먹구구로 하시지 않습니다. 복귀섭리는 재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다시 찾는 역사이기 때문에 원칙을 따라 하십니다. 창조원칙을 따라 재창조의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 놓았지만 지어 놓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입장에 사람이 서 있기 때문에 다시 지어졌다는 조건적인 입장에 갖다 맞춰야 됩니다.


68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는 재창조섭리입니다. 재창조섭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무엇을 먼저 지었느냐? 천사세계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다음엔 만물세계를 지었습니다. 그다음엔 아담 해와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쳐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3단계 원칙을 통해서 오늘날 역사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이 전체 역사는 재창조역사권 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데 있어서는 재창조역사 형태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69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통해서 본연의 이상 형태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는 무슨 섭리를 통하느냐? 재창조섭리입니다. 재창조는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재차 투입하던 사랑의 인연을 그 앞에 대신 투입해야만 재현된 이상적 창조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둘째 계명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계명은 만물을 너의 어머니 아버지 대신, 부부 대신, 자녀 대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 계명, 둘째 계명, 셋째 계명, 이렇게 끝이 나는 것입니다. 종횡을 중심삼은 사랑이상권 내에 있어서 구형적인 이상이 여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70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파탄시키고 파괴하는 분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파괴하는 사탄에 대해 승리해서 재창조 과정을 거쳐서 찾아 나옵니다. 그냥 찾아 나올 수 없습니다. 탕감시켜 나오는 데는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조했던 그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섭리의 전반적 내용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탕감복귀섭리는 구원섭리를 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모든 전체를 우리가 총평하게 되면 첫째는 구원섭리, 둘째는 탕감복귀섭리, 셋째는 재창조섭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구원섭리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생사의 경계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때는 ‘구원받았다.’라고 합니다. 구원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구원섭리는 탕감복귀섭리라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데는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탕감해야 됩니다.


71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인데, 복귀섭리는 탕감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는 그냥 추진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은 죄를 탕감해야 됩니다. 탕감한다는 것은 사탄을 분립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탄의 소유권 내에 있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해서 사탄을 분리하고, 분리함으로써 본연의 기준으로 원상회복이 되어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지은 인류의 죄가 얼마나 크냐는 것입니다. 그 악한 사람들이 지은 죄를 어떻게 탕감해야 되느냐? 인간은 모르지만 선한 사람들이 희생함으로써 탕감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나라의 선한 사람을 몇 사람씩 데려감으로써 그것을 메워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탕감이 안 됩니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이렇게 하면서 세계적인 무대까지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탕감하고 세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탕감의 제물로 간 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72 역사노정에 있어서 탕감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선악이 갈라지고, 또 불행과 행복이 갈라지고, 복 받는 길과 벌 받는 길이 갈라집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도 예외 없이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탕감이 있어야 됩니다. 타락의 감정이 없이 사는 사람은 매일같이 타락의 길을 거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픈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하나님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받고 슬픈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귀한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찾으려니 고통을 당해야 되고, 그것을 찾으려니 슬픈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73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관계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이상을 이루려 했던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일체이상, 사랑이상을 찾을 수 없겠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아야 됩니다. 다시 찾는 데는 탕감복귀를 했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떨어짐으로써 고장 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복귀섭리는 탕감을 향해서 가지만 탕감의 노정을 다 갔다고 해서 하나님이 찾아야 하는 사랑이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재창조 프로그램, 공장의 모든 생산품을 만들 때의 청사진을 중심삼고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메시아의 역할과 사명

74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불러들이신 것은, 가나안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승리적인 민족 기반을 완결지어 하나의 주권을 세운 다음 장차 보낼 메시아를 맞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자기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모시고, 메시아를 중심으로 사탄세계를 쳐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종결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태교단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가 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줄 알았지, 민족적인 승리와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닦아 복귀의 역사를 종결지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75 개인이 완성되지 못하면 새로이 자각된 가정이 형성될 수 없고, 새로운 가정이 나오지 않고는 새로운 민족과 새로운 국가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개인의 완성을 결의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복귀 완성을 그렇게도 고대해 나오셨습니다. 남성이면 남성 한 사람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6천년 역사가 걸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전반적인 목적을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의 남성 완성에 두고 그것을 표준으로 해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완성한 남성을 중심삼고 하나의 여성을 세워 하나의 가정 완성의 표본을 만들고자 하신 것인데, 그것이 메시아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메시아사상을 중심삼고 신랑 신부를 세움으로써 복귀섭리를 귀결지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생활의 기반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세워 놓은 생활관이나 그분이 지향하는 이념은 일체 후대의 만민이 본받아야 할 표본입니다.


76 하나님 복귀섭리의 또 하나의 공식은 메시아를 보내시기에 앞서 중심종교와 중심국가를 세워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과 유태교를 세우시고 그 준비된 터 위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시어 모든 인간이 점차 그와 하나되게 하심으로써 선의 판도를 넓혀 가며 세계복귀, 즉 천국이념을 구현하려고 하셨습니다. 4천년이나 걸려 준비하신 이스라엘 민족과 유태교가 예수님을 맞아 일체가 됨으로써 희생적으로 하나의 뜻을 받들었더라면, 그 당시에 바로 아랍권과 아시아를 통합하고 서양을 연결하여 전 세계 땅끝까지 급진적으로 뜻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 주권으로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였을 것입니다.


77 참사랑과 참생명의 씨를 가진 아담을 잃은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조건이 없는 새로운 씨를 가진 아들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창조 때 아담을 먼저 지었듯이 재창조섭리인 복귀섭리도 타락과 무관한 아들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메시아사상의 근본입니다. 메시아는 사탄의 관장 하에 있는 타락한 혈통을 지닌 사람들의 생명을 부정하고 새로운 생명의 씨를 접붙여 주기 위해서 오시는 참사람입니다. 뿌리는 하나님에게 두었지만 후아담으로 와서 아담이 저질러 놓은 것을 청산해야 되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이 능력만으로 역사할 초인을 메시아로 보낼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78 구세주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대표자입니다. 인간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을 가진 절망자입니다. 이것을 해원성사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구세주입니다. 본연의 사랑을 구해 주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밥 못 먹는 사람 밥 먹여 주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해방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를 해방하는 길은 참다운 사랑을 하는 아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아내가 영원히 사랑하고 남을 수 있을 때 그 남자는 구속이 없습니다. 해방입니다. 본질적 중심인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을 찾아 투입하면서 잊어버리는 입장에 있는 서글픈 하나님입니다.


79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본래 계획하신 참사랑과 평화의 이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원상회복의 섭리, 즉 복귀섭리입니다. 이와 같은 복귀섭리를 위해서 종교들을 세우고 선의 판도를 넓혀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는 이 복귀섭리를 완결짓는 총책임을 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참부모로 오셔서 근본부터 바로 회복해야 합니다.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인류를 참사랑으로 중생시켜 참된 사람, 참된 부부로 회복시켜 참부모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왔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지상의 불신으로 인하여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가시면서 재림을 약속하였습니다. 참부모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전히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