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7장 예술론 (藝術論) - 11

2010. 1. 6. 16:22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十.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비판(批判)

 


  (1)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공산주의의 혁명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의 하나가 예술 활동이었으며, 그 창작 방법은 사회(社會)主義리얼리즘이었다. 그러면 사회주의리얼리즘이란 어떠한 것일까. 레닌은, 예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藝術)은 인민(人民)의 것이다. 예술의 가장 깊은 근원(根源)은 광범위한 노동자(勞動者)계급(階級)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그들의 감정(感情), 사상(思想)의 요구를 기초로 하며, 또 그들과 더불어 성장해야 한다.18)

 


문학(文學)은 당(黨)에 속해야 한다. ...... 비당적문학가(非黨的文學家)를 매장하라! 초당문학가(超黨文學家)들을 매장하라! 문학의 일은 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거리의 일부(一部), 전 노동자계급의 모든 의식적(意識的)인 전위(前衛)에 의해서 운전(運轉)되는, 하나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적(社會民主主義的) 기계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고르키(M. Gorky, 1868~1936)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작가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범죄적(犯罪的)인 모든 것, 그 비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의도(意圖)의 모든 것을 명백히 간취(看取)할 수 있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적인 활동의 위대성의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그 높은 관점에 - 오로지 그 관점에 서는 것이,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에 있어서나 필요하다.

 


현대에 있어서 작가는 동시에 두 가지 역할 즉 〔사회주의(社會主義)에 대한〕 조산부(助産婦)의 역할과 〔자본주의에 대한〕 무덤파기꾼의 역할을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주요한 목표(目標)는 사회주의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세계관(世界觀) 즉 세계감각을 고취(鼓吹)하는데 있다.

 


즉 시(詩)를 짓는 것, 소설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등등은 자본주의의 범죄(犯罪)를 폭로하고 사회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감(正義感)에 불타면서, 혁명을 위하여 떨쳐 일어나도록 작품을 창작(創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2년, 스탈린의 지도하에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소련 예술가들에 의해 공식화(公式化)되면서 문학, 연극, 영화, 회화, 조각, 음악, 건축 등의 모든 예술분야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의 측면에서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정확히 묘사할 것. ②예술적 표현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혁명(革新) 및 노동자(勞動者)들의 교육이라는 과제(課題)와 일치(一致)시킬 것.

 


그러면 이와 같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성립시킨 이론的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의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에 관한 이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生産) 諸관계(關係)의 총체(總體)는 사회의 경제적 기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실의 토대가 되어서 그 위에 법률적(法律的), 정치적(政治的)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세워지며, 또 일정한 사회적 의식(意識) 제형태(諸形態, 여러 형태) (예술을 포함(包含))는 이 현실의 토대에 대응(對應)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생겨나면 그것은 최대의 능동적인 힘이 되어서 자기의 토대가 강하게 되도록 능동적으로 협력하며...... ,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토대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며, 토대가 형성되고 강하게 되는 것은 능동적(能動的)으로 돕기 위해서이며, 수명이 다한 토대를 낡은 상부구조와 함께 근절시키려고 능동적으로 싸우기 위해서인 것이다.

 


상부구조(上部構造)는 어떤 경제적 토대가 살아서 일하는 한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사는 기간은 길지 않으며, 한 경제적 토대의 근절(根絶)과 함께 근절되고 소멸(消滅)한다.

 


이상을 총합(總合)하여 요약하면 공산주의예술은 자본주의 제도와 그 상부구조인 정치, 법률, 예술 등을 근절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면서 그 경제체제의 유지(維持)?강화(强化)에 적극적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이론을 근거로 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세워진 것이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에 대한 비판

 


문학은 당(黨)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레닌의 말, 작가는 인간정신의 기사(技師)라는 스탈린의 말, 작가는 사회주의의 조산부(助産婦)요, 자본주의의 무덤파기꾼이다라는 고르키의 말처럼 예술가나 작가에게는 당(黨)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요구되며, 예술가나 작가의 개성(個性)이나 자유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혁명 이후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기까지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감시와 억압속에서 살아 왔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추진(推進)한 1930년대의 후반에는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이단(異端)의 이름으로 체포(逮捕)되고 숙청(肅淸)되었던 것이다.26) 스탈린의 사후(死後)에도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예술이론으로서 군림(君臨)해 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반체제(反體制)로 돌아서게 되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리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지적(知的) 또는 독단적인 목적을 예술에 쓸데없이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기획(企劃)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27)

 


스탈린상(賞)을 수상(受賞)했다가 나중에 스탈린 비판자로 돌아섰던 소련의 작가 이리아 에렌부르그(I. Ehrenburg, 1891~1967)는 방직공장(紡績工場)의 여직공을 그린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며 인간의 감정(感情)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불과하다'28)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그려지는 인간상(像)을 혹평했던 것이다. 예술평론가 조요한(趙要翰)도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있어서의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소련(蘇聯)의 작가... 필자)이 묘사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일말(一抹)의 불안(不安)도 엿볼 수 없는 희한한 주인공(主人公)들이었다. 그것은 무갈등(non-conflict)의 이론이 유포(流布)되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즉 인간적인 깊은 고민(苦悶)과 관련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기의 독특한 생활이 없는 주인공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간의 내적세계(世界)가 표현될 리가 만무하다.

 


1986년 4월,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과 관련하여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원전(原電)의 참사(慘事) 원인이 소련의 관료주의에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고 비극이다. 참사도 문제였지만 우리 사회에 관료주의가 이처럼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으며, 당(黨)과 정부(政府) 차원에서 시도했다가 실패한 관료주의의 청산(淸算) 노력을 작가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6월말(1986)의 제8차 소련 작가동맹전국대회에 즈음하여 관리(官吏)의 위선을 풍자한 고르키의 본을 받아서 여러 작가들은 관리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인 글을 써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일부 작가들은 그렇다면 문학작품의 사전 검열을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오랫동안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는 이름아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직전에 백가쟁명정책(百家爭鳴政策)의 일환으로 한 때 문화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대부분의 문화인들은 사회주의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등소평이 집권한 후 실용주의(實用主義)를 채택하여 문화인들에게 자유를 조금씩 허락해 주었더니, 중공의 저명한 이론가 王若水는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소외(疎外)가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예술, 그리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順應)해야 하는 예술로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완전히 거짓된 예술임을 알았을 것이다.

 


  (3) 작가(作家)에 의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고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예술가나 작가들에 대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찬미(讚美)할 것을 강요했지만, 참다운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나 작가들은 오히려 공산주의시대에도 공산주의의 허위(虛僞)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 전까지 공산주의에 매혹(魅惑)되어 있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Gide, 1869~1951)는, 1936년 고르키의 장례식에 초청되어 참석한 후, 약 일개월간 소련을 여행(旅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그가 실제로 본 소련사회에 대한 실망을 소비에트 기행기(紀行記)에서 솔직히 표현하였다. 그는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 전 나는 소비에트연방(聯邦)에 대한 나의 감탄과 사랑을 감히 선언했다. 그 나라에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실험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희망(希望)으로 부풀게 했고 또 거기에 대하여 우리들은 무한(無限)한 진보(進步)와 인류를 이끌어 갈 만한 비약을 기대하였던 것이다.……우리들의 마음과 정신(精神)속에서 우리들은 미래의 문화 그 자체를 소비에트연방의 빛나는 운명에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개월간(一個月間)의 여행도중 소련의 민중들과 접촉해 본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비에트에 있어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리고 모든 것에 일정한(한 가지) 의견(意見) 이외의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전부터, 그리고 확고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러시아인과 말하고 있어도 마치 러시아人 전체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소련사회(蘇聯社會)를 다음과 같이 심하게 비난(非難)하였다.

 


오늘날 소비에트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수락(受諾)하는 정신(精神)이며, 순응주의(順應主義)이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어떤 나라에서도, 예컨대 히틀러시대의 독일에서 마저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不자유하고, 이렇게까지 억압(抑壓)되어 있고, 공포(恐怖)에 떨며 종속(從屬)되었을까.

 


소련의 작가 파스테르나크(B. L. Pasternak, 1890~1960)는 아무도 모르게 닥터 지바고를 써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환상(幻想)을 토로하고 사랑의 사상을 호소했었다. 그 책은 소련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출판되어 대단한 호평(好評)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그에게는 노벨문학상이 수여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국내(國內)의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除名)되었고, 반동적(反動的) 반소작가(反蘇作家)로서 비난받게 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그 책속에서 그 자신의 양심(良心)을 상징(象徵)하는 지바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주의(主義)가 과학(科學)이라구요? ……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분야이기에는 너무도 자제(自制)가 부족(不足)하다고 생각해요. 과학은 보다 더 균형적(均衡的)일 것이라고 보아요. 마르크스主義가 객관적(客觀的)이라구요? 나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사실에서 더 유리(遊離)되어 있고 더 자기폐쇄적(自己閉鎖的)인 사상(思想)은 없다고 봅니다.

 


그는 또 혁명가(革命家)가 지식인들에게 취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훌륭했지요. 일을 성실하게만 해 주시면 대환영이지요. 사상(思想) 특히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면 더욱 좋구요. 환영(歡迎)은 당연지사(當然之事)지요. 잘 해 주어요. 일에 전념하고, 투쟁심을 갖고 탐구(探求)해 주어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거리를 잡고보면 사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겉치레일 뿐이며, 실제로는 혁명과 권력의 좌(座, 자리)에 있는 者를 구가(謳歌)하는 말씀의 액세서리(부속품)에 불과하였지요.

 


  (4) 통일사상에서 본 공산주의예술론의 오류(誤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오류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원인은 예술을 작가(作家)의 개성(個性)을 살리면서 전체를 위한 창작 또는 자신을 위한 감상과, 미(美)와 기쁨의 창조활동으로 보지 않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하면서 인민을 교육하는 어용수단(御用手段)으로서의 예술로 본 데 있다. 예술가는 작품속에서 개성(個性)을 최대한 발휘(發揮)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인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는 개성(個性)을 박탈하고 작품을 획일화(劃一化)시켜 버렸다. 따라서 거기에서 참다운 예술작품이 생길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예술활동의 근본 기준을 상실(喪失)해 버린 데 있다. 그 대신 당의 방침에 입각한 제멋대로의 기준을 세워서 예술가, 작가를 그 기준에 일치하도록 강요(强要)했던 것이다. 셋째 원인은 미(美)와 사랑이 표리(表裏)의 관계이기 때문에 예술과 윤리도 표리(表裏)의 관계여야 함을 모르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사랑의 윤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술은 사랑이 없는 예술 또는 공산당의 인민지배(人民支配)의 도구로서의 예술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넷째 원인은 예술이 결코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예술을 상부구조로 본 데에 있다. 그 때문에 예술은 경제체계(經濟體系(土臺))의 시녀(侍女)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술은 경제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의 마지막 부분의 서설(序說)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곤란(困難)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사회적인 발전형태에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곤란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아직도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고, 어떤 점에서는 규범(規範)으로서 그리고 도달(到達)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서의 의의(意義)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있다.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하면, 그리스의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일부인 예술이나 문학이 지금쯤(마르크스 當時)은 형태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야 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에 아무런 흥미(興味)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예술이나 일리아드(Iliad), 오디세이(Odysseia)와 같은 서사시(敍事詩)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생활의 규범(規範)으로까지 삼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물사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곤란을 느낀다고 실토(實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마르크스 자신이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의 오류를 자증(自證; 스스로 인증)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망(基本的 欲望)이 있다. 이 욕망은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그리고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따라서 작품중에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스의 예술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음은 그것에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이 바라는 영원(永遠)한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동시대에 소련사회의 부패를 다같이 고발하였지만, 작풍(作風)에 있어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작가, 고르키와 톨스토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르키는 폭력(暴力)에 의하여 자본주의사회를 타도(打倒)하고자 공산주의에 동조(同調)하면서, 예술가의 사명(使命)은 혁명을 고무(鼓舞)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예술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운동(革命運動)을 미화(美化)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고르키의 작품인 어머니는 사회주의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한 노동자의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혁명운동으로 투옥(投獄)된 외아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일념(一念)에서, 계속해서 그 아들을 설득하려다가 도리어 그 아들에게 설득당하여 사회의 모순성(矛盾性)을 자각하고 드디어 혁명운동의 적극적(積極的)인 참가자가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당시의 사회악(社會惡)을 고발하면서 그 해결의 길은 사랑에 의한 참다운 인간성(人間性)의 회복에 있다고 설파(說破)하였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의 하나가 부활(復活)이다. 배심원(陪審員)으로서 법정에 선 한 귀족청년이, 자기가 젊었을 때 한 순간의 잘못으로 유혹(유혹(誘惑))한 하녀가 범죄하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실을 본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하던 끝에 회개하여 그녀를 구할 결심을 한다. 드디어 그녀는 갱생(更生)되고 그 청년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내용이다.

 


고르키가 택한 것은 외적인 사회혁명의 길이고, 톨스토이가 택한 것은 내적인 정신적(精神的) 혁명(革命)의 길이었다. 어느 것이 올바른 길이었을까. 고르키가 택한 폭력혁명에의 길은 그 후 사회주의사회의 실태가 보여준 바와 같이 인간성의 억압(抑壓)과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부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톨스토이가 택한 길은 비록 사회전체를 구한다는 점에서는 성공치 못한 점이 있지만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올바른 방향(方向)의 길이었다.

 


통일사상은 인간과 사회가 다 같이 본연의 모습으로 개혁(改革)되는 가장 올바른 길을 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정확히 앎으로써 본래의 인간의 모습, 본연의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방향(方向)을 향하여 인간과 사회를 개혁해 가면 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새로운 예술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사랑)을 중심으로하여 이상주의(理想主義)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통일된 통일주의예술이다. 그것은 본연의 인간과 본연의 사회라는 이상(理想)을 향하여 현실을 개혁(改革)해 나아가는 예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