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후편 - 제6장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 7

2013. 1. 6. 20:09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3. 예수님의 공생애 노정

요셉가정에서 30년 동안 축복의 기대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남편 요셉이 협조하지 않아 예수님에게 신부를 얻는 길이 막혔습니다. 사가랴가정이 협조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영적 기반을 찾기 위해서 공생애 노정을 출발 합니다.

 

예수님의 출가

예수님은 30세에 집을 나와 말씀을 전파합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을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했지만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반대하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장 58절)라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있을 때에도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사가랴를 찾아가도, 엘리사벳을 찾아가도, 세례 요한을 찾아가도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가도 같은 입장이므로 예수님은 어느 곳 하나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집을 나온 예수님은 더더욱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고되고 힘든 개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친척이 가나에서 혼인잔치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시골의 경우 결혼하면 친척들이 모두 가서 도와줍니다. 그런 풍습에 따라 마리아도 친척의 혼인잔치를 도우러 갔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아서(요한복음 2장 2절) 잔칫집에 갑니다. 예수님이 그 곳에 간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의 친척이 결혼하므로 어머니가 일하면서 아들 예수를 장가보낼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예수님의 결혼 문제는 아랑곳없이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요한복음 2장 3절)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한복음 2장 4절)라고 대꾸했습니다.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한복음 2장 5절)고 일렀습니다.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해서 하인들이 돌 항아리 여섯 개에 아귀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여 하인들이 갖다 주니 손님들이 이전에 먹었던 포도주보다 훨씬 좋은 포도주라며 좋아했습니다(요한복음 2장 6~10절).

 

둘째는 예수님이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니 배가 고파서 제자들과 잔칫집에 가서 한번 먹기 위해서입니다. 친척 집인데다 어머니도 일을 도와주고 계시므로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할 볼 때, 예수님이 얼마나 비참한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가갈 수 있도록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혼인잔칫집에 가서 뭐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갔는데 그 뜻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고 부르며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동생들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마태복음 12장 47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48~5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은 더 깊어지고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사연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사마리아는 북조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은 남조 유대의 수도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가려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 게 제일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에 발을 내디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멀리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 피곤해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여섯 시쯤 되었습니다(6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7절). 다음의 성구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물음에 예수님이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고 말씀했습니다. 여자가 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주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물었습니다(12절). 그러자 예수님이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15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25절)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그이라고 하자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며 이틀 동안 사마리아에 머물렀습니다(40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로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창녀와 같은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창녀를 붙들고 남성으로서 하소연한 자리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였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이니까.’(22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파는 가룟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25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예수님을 판다고 했는데, 가룟 유다가 자기가 그 사람인가,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고 확답을 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접니까? 제가 팝니까? 저는 안팝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지켜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지목됐기 때문에 가룟 유다를 데려가서 회개를 시키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팔지 못하도록 가룟 유다를 가두어 두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파는 길을 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담판 기도

마지막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제자인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면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장 36~38절)고 말씀했습니다. 죽게 되어서 심히 괴로우니까 깨어서 같이 기도하자고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의 담판기도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에서 46절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놓고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다 데리고 가지 않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간 이유는 사위기대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기대(完成基臺)이고, 존재기대(存在基臺)이고, 힘의 근본기대(根本基臺)이고, 사랑의 근본기대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해서 세 제자는 실체 사위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찾아오고 거기에서 모든 영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담판기도를 할 때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기도를 마치고 와서 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장 40~41절)고 책망하시고 다시 두 번째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장 42절)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고 있는 제자들을 두고 세 번째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26장 44~4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담판기도를 한 후 하나님의 소망을 다 이루지 못하여 이제 죽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해서 영육의 기반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세 제자가 깨어서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눈물의 기도를 했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를 했더라면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그 자리에서 무릅을 꿇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그들이 선두에 서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 및 체포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가지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심문을 받습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가야바에게 공개재판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재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7절에서 66절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고발당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베드로가 따라갑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담판기도를 하기 전에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망을 간 가운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21장 15절).

 

갈릴리 호숫가에 가면 베드로가 처가살이를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호숫가에 조그마한 집이 있는데 베드로는 거기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날그날 먹고 사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안 잡으면 자기 일족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언제나 주를 위해서 죽겠다.’ 하는 마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에 앞서 예수님은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복음 13장 38절)라고 예고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기준에서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미 베드로 속에는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불평불만을 하고 의심할 때 사탄이 들어간 것입니다.

 

다른 제자는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했다면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자기 마음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법정에 들어섰을 때 가야바 대제사장이 나와서 ‘네가 유대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라고 말합니다(누가복음 23장 3절). 두 번, 세 번 물어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해야 하는 사명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종들이 ‘바로 저 사람도 예수당이다, 예수 제자다, 예수 따라 다니는 것을 봤다.’고 하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닭이 세 번 울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합니다. 베드로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사탄이 나갑니다. 사탄은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떠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자기의 책임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제자들로부터 메시아임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마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바람에 사탄에게 모든 섭리적 기반을 넘겨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십자가상에서 오른편 강도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길이라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법정에 끌려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서 정치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1~2절). 총독이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한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자 총독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11~14절).

 

당시 유대에는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15절). 그 때 바라바라고 하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그것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준 무리를 의식한 말이었습니다(16~18절).

 

빌라도가 법정에 앉아있는데 빌라도의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절)라고 전했습니다.

빌라도는 내심에 예수님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 정반대로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외쳤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무리가 바라바라고 대답했습니다(20~21절).

 

빌라도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무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빌라도가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무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더더욱 소리칩니다(22~23절).

 

빌라도가 자기의 변호가 아무 효험도 없고 오히려 민란만 부채질한다는 생각에 물을 가져다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하면서 체념합니다. 그러자 백성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24~26절).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갖다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도록 해놓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면서 희롱했습니다. 희롱을 마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27~31절).

 

예수님이 형장으로 가다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함께 골고다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혔습니다(31~35절).

 

십자가상의 예수님

누가복음 23장 27절에서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골고다로 가는 것을 보고 유대 여인들이 슬피 울면서 따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장 6절)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길이니 그분의 길을 제자가 따라가고 이스라엘 민족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이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고 조롱당하는 고통이 컸지만, 예수님에게는 당하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괴로움을 당하실 하나님에 대한 걱정이 더 컸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4000년 간 하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종인 사탄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던 창조주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걱정은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위로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쳤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하나님의 사정을 알 것이며, 누가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2000년이 지나 재림할 때까지 홀대를 받고 억울하고 분한 자리에서 해방 받지 못할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량하고 불쌍한 하나님을 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라고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 하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는 말씀을 마친 후에 운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십자가상의 운명(殞命)으로 부활섭리를 이루게 됩니다.

 

4. 예수님의 영적 부활

예수님의 영적 부활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사도행전 2장 1~4절), 기독교가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해야 할 사명은 성혼축복을 받고 참부모가 되어서 인류를 축복하고 원죄를 청산해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혼을 하지 못한 것이 예수님의 한이었습니다.

 

참가정을 이루어야 창조목적이 완성됩니다. 참가정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소원하셨던 조국 광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슬픔 중의 슬픔은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결혼의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혼축복을 받도록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슬픔은 혈통을 남기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혈통을 남기기 위해서 4000년 동안 수고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는데, 예수님은 혈통을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원통하고 불쌍하게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슬픔은 영육 아울러 인간을 구원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한 심정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5. 예수님의 해원성사

예수님의 원통한 죽음을 해원할 사람은 오직 참부모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참부모님만이 예수님의 사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고 오신 참부모님은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그렇게 한이 맺혀 있으니 그를 보낸 아버지 하나님도 한이 맺혀 있습니다. 참부모님은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눈물로써 예수님을 증거하고 애통한 사정을 붙들고 몸부림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로하시고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사정을 밝히신 참부모님은 지난 2003년 12월 22일 예루살렘 성에서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왔는데, 왕이란 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참부모님은 당신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이슬람교·가톨릭 등 여러 종교 대표들과 3000여 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또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어서 로마의 의회에 나가 당당하게 메시아를 선포하고 로마를 통해서 세계를 수습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참부모님은 2004년 2월 4일 제2 로마와 같은 미국 워싱턴에서 예수님의 왕권 즉위식을 해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생각을 할 엄두를 못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하기 위해서는 두 종족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사가랴 종족은 가인의 종족이고, 요셉 종족은 아벨의 종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 위에 이 두 종족을 세워서 메시아를 보내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 입장인 사가랴가정과 아벨 입장인 요셉가정에서 예수님을 모시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 종족이 사생결단 전력투구로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가랴와 요셉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고, 세례 요한은 분봉왕(分封王)이 됩니다. 분봉왕은 나라의 왕과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할 때 유대 백성들이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누가복음 3장 15절).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분봉왕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요셉 종족과 사가랴 종족이 하나 되어 예수님을 모셨으면 세례 요한이 분봉왕이 되어 그 기대 위에서 예수님은 당당하게 메시아를 모셨으면 세례 요한이 분봉왕이 되어 그 기대 위에서 예수님은 당당하게 메시아를 선포하고 왕으로서 출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은 나라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스데반이 제일 먼저 순교당했습니다. 그도 마지막에 죽을 때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수 없이 죽어가는 무리들이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하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며 기도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도 하나님은 나라가 없으니까 그들을 붙들어 주지를 못했습니다. 나라의 권세는 사탄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의 아들딸을 죽이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입니다.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 수없이 나라를 빼앗겼다가 되찾아오고 나라 때문에 피를 흘렸습니다. 메시아가 왔을 때,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사연이 이 민족의 역사에 깃들어 있습니다. 조국 광복, 하나님의 조국, 하나님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