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6. 20:29ㆍ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탕감복귀섭리
(1) 타락인간은 중간 위치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창조주이기 때문에 아담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성장기간에 타락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의 중간위치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아담과 상대할 수 있지만, 사탄은 타락한 아담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사탄도 타락한 아담과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도 상대할 수 있고, 사탄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위치에 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늘 편으로 가느냐, 사탄 편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도 결정할 수 없고 사탄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그렇게 됐으니 타락한 인간이 어떤 조건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편도 되고 사탄 편도 됩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그것이 조건(善條件)이 되어 하나님 편에 서고, 악한 생각을 하면 그것이 조건(惡條件)이 되어 사탄 편에 서는 것입니다. 재물도 하나님 편에 쓰이지 못하면 사탄 편에서 쓰기 때문에 악을 발전시키는 조건이 됩니다.
(2) 탕감조건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했을 때, 그 자리로 복귀하기 위하여 치르는 대가를 탕감(蕩減)이라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탕감이란 말은 복된 말입니다. 탕감이 없으면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떨어진 인간이 탕감을 치르고 본연의 위치로 복귀하려면 거기에 합당한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타락인간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합당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조건(蕩減條件)이라 합니다. 탕감조건은 탕감복귀(蕩減復歸)를 위해서 세우는 조건을 말합니다.
탕감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집니다. 타락한 인간이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탕감복귀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잘못하면 그냥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의 종류
탕감조건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 21장 23절에서 25절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눈이 범죄 했으면 눈을 빼고, 손이 잘못했으면 손을 잘랐습니다. 그것이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둘째,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구약시대를 지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 민족은 요단강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어느 정도의 신앙과정을 거친 사람을 세워놓고 문답을 한 뒤 머리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려 세례를 줍니다. 그렇게 해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조건을 세워줍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내 피와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와 살 대신 떡과 포도주를 먹었다고 하는 조건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 성당에서는 성만찬식을 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었다는 조건을 세웁니다. 그것은 단지 조건일 뿐입니다.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나서 사탄의 혈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피와 살을 대신해서 성만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 원죄도 청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조건일 뿐 원죄가 청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말로 감동시켜서 빚을 갚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해서 천 냥 빚을 탕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셋째,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이 있습니다. 지은 죄보다 큰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보다 적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웠다가 실패하면 가중된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게 됩니다.
그 예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 번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양·암소 세 제물을 쪼개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했는데, 아브라함이 소생적 입장에 있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가치의 탕감을 치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를 쪼개야 하는데 그것을 쪼개지 않음으로써 100세에 얻은 자기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해야 하는 엄청난 탕감조건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급에 가서 400년이나 고역을 겪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한번 조건에 걸리면 탕감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서 실수할 때에는 가중해서 탕감을 치러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대에 탕감을 못 치르면 2대, 3대까지 넘어가면서 치러야 합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탈출하여 시내 산을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노정에도 가중된 탕감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모세가 종족을 대표한 지파장 열두 명을 40일 동안 여리고성으로 정탐하러 보냅니다.
지파장들이 정탐을 끝내고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할 때, 두 지파장을 빼고 열 지파장이 불신의 보고를 합니다. 열 지파장이 또 불신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불신했던 노정을 탕감복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서 40일을 40년으로 광야에서 유리고객하다가 애급에서 나온 1세대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고 신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중심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와 같은 내용은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을 세우는 방법
탕감조건은 반대 경로(經路)로 세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후아담으로 보낸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심정적 탕감복귀를 위해서 반대의 경로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후아담인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며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심정적인 잘못을 탕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렸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한번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따라서 탕감복귀는 그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조건은 반드시 반대 경로로 세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담의 후손 된 전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반대로 행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는 사탄의 품으로 넘어갔습니다. 사탄의 품에 있는 인류를 찾아서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려면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입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탕감노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절대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며, 어느 누구도 원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욥기 2장을 보면, 욥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핍박을 받고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참소 조건에 걸리게 되면 하나님도 꼼짝없이 내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 원망하면 안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다하며 원망의 소리는 없어지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결국엔 탕감조건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욥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욥기의 교훈은 만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도 사탄의 참소를 이겨내는 자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참소 받지 않고 사탄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탕감을 치르는 길입니다.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탕감조건을 세워서 가는 길에 어느 누구를 세울지 모르니 우리는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상대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나는 그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싫어하고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더라도 그것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 속에서 배후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를 탕감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내게 기쁨이 오고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만들어 주면서 나에게 그런 길을 넘게 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타락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미워서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지도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이 전개되면,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아. 저분을 보니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내 속에도 저런 요소가 있겠지.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도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그 사람의 모습이 비쳐진 것은 내 속에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를 세워준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보고 비판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내 속에는 그런 요소가 없는가,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정의 고통을 주지는 않았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탕감조건은 반대의 경로로 세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원망부터 하면 안 됩니다.
탕감조건을 세우는 인물
탕감조건은 타락한 인간 자신이 세우는 것입니다. 탕감조건은 부모가 대신 세워 줄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대신해 세워 줄 수도 없습니다. 또 형님이 동생 대신, 동생이 형님 대신 탕감조건을 세워 줄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네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 탕감조건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동일한 가치의 탕감조건, 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 보다 큰 가치의 탕감조건입니다. 그 가운데서 반드시 하나를 세워야 합니다.
셋째, 탕감조건은 반드시 반대의 경로로 세워야 합니다.
넷째, 탕감조건은 타락인간 자신이 세워야 합니다.
타락인간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
타락인간이 세워야 하는 탕감조건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아담과 해와가 세워야 할 원래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탕감조건은 반대 경로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탕감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탕감조건을 세워 돌아가야 합니다.
원래 아담·해와가 세워야 할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종적인 믿음의 기대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믿고 실천해서 말씀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실체가 된 인격 완성자는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심정 완성자입니다. 인격 완성자와 심정 완성자가 되는 조건은 하나님의 ‘따먹지 말라.’는 절대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말씀의 실체, 즉 인격 완성자가 되는 것이 종적인 믿음의 기대입니다.
종적인 절대 믿음의 기대를 세운 다음에 세워야 할 두 번째 조건은 횡적인 실체기대입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해와는 말씀의 실체가 되고 인격의 완성자가 됩니다. 인격 완성자라는 말은 인격이 참사랑의 실천에 의해서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에 참사랑의 실체라는 뜻이고, 참사랑은 심정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심정의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래서 절대성 위에 세워진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부부가 되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실체를 지닌 사랑을 하면 종인 천사장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된 천사장이 들어가서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켰습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사랑해야 하고(愛), 아담을 중보로 세워야 하고(仲), 아담에게 순종·굴복하고(屈), 아담을 통해서(通)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혈기를 부리고 교만해져서 결국 악을 번식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실체기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여 말씀의 실체가 됨으로써 인격 완성자가 되는 것이 종적인 믿음의 기대라면, 인격 완성자로서 만물과 천사를 주관하고 피조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 횡적인 실체기대입니다.
아담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세웠더라면, 그는 천주의 중심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지 못했습니다. 원래 아담· 해와가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횡적으로 인격 완성자로서 천사와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장은 아담에게 애중굴통(愛仲屈通)해야 합니다. 그 입장을 세우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질서요, 뜻이요, 이상이었습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타락성은 천사장·아담·해와가 타락할 때 천사장으로부터 우발적으로 인간에게 들어온 악한 성품입니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고, 실체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모이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를 자녀로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고, 아담과 해와는 그 말씀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담과 해와의 성장기간 동안에는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책임분담으로 스스로 성장하고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고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담·해와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또 아담을 중보로 세우고 아담 앞에 순종·굴복해야 하는데도 혈기를 부려 자기의 존재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사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천사장은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역주관(逆主管)을 했습니다. 역주관은 천사장이 해와를 주관하고, 해와가 아담을 주관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천사장에게 교만심이 들어가고 원리적인 하나님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천사장은 아담을 사랑해야 하고, 아담을 중보로 세워야 하고, 아담에게 순종·굴복하고,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의 입장에 있는 사람과 천사장 편에 있는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이와 같이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타락성을 벗는 탕감조건은 아담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로 내세워서 순종·굴복하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갔다는 조건을 세워서 사탄의 요소를 빼내고 사탄을 분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천사장의 입장에 선 인간이 아담 입장에 선 인간에게 애(愛)·중(仲)·굴(屈)·통(通)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메시아를 위한 기대
역사상 인간의 소망은 메시아를 모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만나야 합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없으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타락한 인간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져야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기대에는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는 원래 아담이 세워야 할 창조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기대입니다. 아담이 그 기대를 세웠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두 기대를 세우지 못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과정에서는 그 두 기대를 세우지 못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과정에서는 그 두 기대를 세워야만 메시아가 오실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와야 하나님은 뜻을 이룰 수 있고, 인간은 원죄를 청산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입장에서도 메시아가 필요하고, 인간도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해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소유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몸, 당신의 아들딸, 당신이 세운 참부모의 이상, 참가정의 이상, 그 다음에 민족·국가·세계·천주의 이상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유권을 잃고 마음 둘 곳, 발붙일 곳이 없는 불쌍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믿음의 기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기대가 하나님의 소유권을 결정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믿음을 세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소유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기대는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려면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조건물(條件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세우는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중심인물은 아버지이고, 조건물은 상징헌제(象徵獻祭)입니다.
원래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들고 말씀의 실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불신함으로써 말씀을 잃어버리고 만물보다도 못한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을 앞세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씀을 대신하여 조건물을 드리는 것이 상징헌제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리고, 노아가정은 방주를 짓고, 아브라함가정은 세 제물을 드렸습니다. 모두가 말씀을 대신한 상징헌제입니다.
모세 때에 비로소 종의 자리까지 갔기 때문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율법으로 구약시대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에는 복음을 세워 신약시대를 이어가고, 재림주님 때에는 원리와 말씀으로 성약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조건물이 상징헌제에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이 성장기간입니다.
아담이 1대에 성장을 완성해야 하는데, 1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성장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은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야 하는 성장기간이었습니다.
성장기간은 12수·4수·21수·40수의 수리적 기간(數理的期間)입니다. 아담·해와 1대는 직접 완성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이 수리적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면 성장기간인 12수·4수·21수·40수는 자동적으로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해와는 타락으로 이러한 수리적 완성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는 탕감복귀해야 하는 수(數)가 되었습니다.
2) 실체기대
인간은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 다음에는 실체기대를 세워야 합니다.
실체기대는 주관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실체기대는 악이 선에게 굴복하여 선이 악을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이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해와가 완성했으면 천사장과 만물세계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선악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악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선악을 분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립된 선이 분립된 악을 주관해야 하고, 분립된 악이 분립된 선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대는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실체기대는 ‘하나님의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믿음의 기대를 세워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면, 실체기대는 인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고, 아벨은 가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 되어야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세워집니다.
믿음의 기대에 믿음을 세우는 중심인물과 조건물이 있는 것처럼 실체기대에도 중심인물이 있고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기대에서는 조건물이 아니고 조건(條件)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직접 타락성을 벗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대를 세울 때에는 중심인물과 조건물, 그리고 수리적 기간이 필요합니다. 실체기대는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실체기대에서 원죄와 타락성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분립하고 복귀하기 위해서는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기대에 필요한 조건물과 실체기대의 조건은 다릅니다.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버지이고, 실체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장자가 아니라 그 믿음을 계승한 차자입니다. 이미 타락해서 선악의 모체가 된 아담·해와를 분립하여 장자는 사탄 편에 세우고, 차자를 하나님 편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중심인물인 아버지가 믿음을 세우고 아버지의 믿음을 차자에게 계승해야 믿음의 기대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인 차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믿음을 그대로 게승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버지이며, 실체기대에서 중심인물은 차자입니다.
차자는 아버지의 믿음을 계승함으로써 비로소 실체기대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원리의 길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복귀의 길에서 이 원리가 적용됩니다.
역사를 보면, 아무나 주인이 되고 자기 스스로 어떤 사명을 인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3.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
인간조상 아담·해와는 완성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여 무원리권(無原理圈)에 떨어졌습니다.
타락인간은 복귀섭리에 따라서 심령 기준이 발달해 갑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동안은 무원리권에서 원리권(原理圈)으로 복귀하는 섭리시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소생급(蘇生級)에 이르는 구약시대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장성급(長成級)에 이르는 신약시대입니다. 재림주로부터 완성기까지는 심령의 기준이 완성급(完成級)에 이르는 성약시대입니다.
1) 말씀에 의한 섭리시대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말씀으로 지어진 실체 만물보다 못한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말씀을 받기 위해서 기대를 세우는 시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의 구약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인간이 만물을 앞세워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찾아 나아가기 때문에 말씀기대 섭리시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소생구약시대(蘇生舊約時代)입니다.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장성신약시대(長成新約時代), 재림주 이후의 섭리시대는 완성성약시대(完成成約時代)입니다.
2) 부활섭리시대
부활섭리로 볼 때, 타락한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부활기대 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소생부활 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는 장성부활 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 재림주부터 완성기까지는 완성부활 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입니다.
3) 믿음의 기간 탕감복귀 섭리시대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으로 볼 때, 타락한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를 위한 기대를 세우는 탕감복귀 기대섭리시대(蕩減復歸基臺攝理時代)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이르면 기대섭리시대는 끝이 납니다. 집을 짓기 위해 터을 닦아놓으면 그 터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초를 세워서 건물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 섭리시대(蕩減復歸攝理時代)이고,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탕감복귀섭리 연장시대(蕩減復歸攝理延長時代)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었기 때문에 섭리는 완성되지 못하고 연장되었습니다.
재림주가 오신 이후는 탕감복귀섭리 완성시대(蕩減復歸攝理完成時代)입니다. 그 후로는 탕감복귀라는 말이 없어집니다. 탕감복귀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이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탕감조건을 세워 복귀해 나가는 것을 이릅니다. 탕감조건을 다 세우면 복귀라는 말도 저절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탕감복귀시대에서 복귀섭리시대로, 복귀섭리시대에서 마지막 섭리시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탕감복귀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섭리시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3차에 걸쳐서 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웠는데, 노아가정에서는 함의 실수로 실패했고, 아브라함가정에서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헌제 실수로 실패했습니다. 마지막에 야곱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 기대를 세웁니다.
메시아을 위한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범위로 볼 때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동안은 가정적 기대섭리시대(家庭的基臺攝理時代)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은 민족적 기대섭리시대(民族的基臺攝理時代)이고, 예수님부터 재림주까지 2000년은 세계적 기대섭리시대(世界的基臺攝理時代)이고, 재림주가 오신 이후는 천주적 기대섭리시대(天宙的基臺攝理時代)입니다.
왜, 모두 기대(基臺)가 들어가느냐 하면, 메시아가 오더라도 그 기대를 세워서 섭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기대를 세워서 승리해야 하고 천주적 기대를 세워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가정적 기대·민족적 기대·세계적 기대·그리고 천주적 기대 이 네 자리를 전부 거쳐 가야 합니다.
5) 책임분담 섭리시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는 책임분담 기대섭리시대(責任分擔基臺攝理時代)입니다. 아담이 책임분담을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때까지는 책임분담을 다했다는 조건을 세워서 복귀섭리를 전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는 하나님 책임분담 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 속에 들어가서 죄인의 모습을 쓰고 죄인들의 손을 잡고 본연의 길로 복귀해 가는 수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성신을 맞아 아버지의 모든 것을 대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부터는 예수와 성신 책임분담 섭리시대(Jesus 聖神責任分擔攝理時代)입니다.
6) 섭리적 동시성시대
역사상에 동시성시대(同時性時代)는 세 번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때부터 아브라함까지를 상징적 동시성시대(象徵的同時性時代)라 하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때까지를 형상적 동시성시대(形象的同時性時代)라 합니다. 또 예수님부터 재림주 때까지를 실체적 동시성시대(實體的同時性時代)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동시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주를 통해서 뜻을 완성하면 뜻이 연장되지 않기 때문에 전시대(前時代)의 복귀노정은 더 이상 반복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제 섭리적 동시성시대가 끝날 때가 왔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동시성 시대가 없는 시대가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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