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5장 부활론 - 2

2013. 1. 6. 20:37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부활섭리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역사의 배후에서 구원섭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말하는데, 다시 사는 섭리를 부활섭리(復活攝理)라고 합니다.

부활섭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요, 복귀섭리는 재창조섭리(再創造攝理)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창조원리를 세웠는데, 복귀섭리에서 재창조할 때는 원리를 다시 세우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원리를 잃어버렸으므로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부활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복귀란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뜻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 뜻을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뜻은 절대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바로 복귀섭리입니다. 그런데 복귀섭리는 다시 창조하는 재창조섭리입니다. 재창조는 원리를 새로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세우셨던 설계도인 창조원리에 따라서 합니다.

 

        1) 부활섭리의 원칙          

 

부활섭리의 원칙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완성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책임분담이 하나 되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로 성장함으로써 만물을 창조했다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책임분담은 말씀이고, 인간책임분담은 믿음과 실천입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은 책임분담을 못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섭리의 완성은 하나님의 책임분담(말씀)과 인간의 책임분담(믿음과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는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장성기 완성급에서 죽은 인간이 되었으므로, 다시 육신을 터로 해서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셋째,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은 1대에 완성할 수 있는 원리권에 있었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모두가 비원리권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역사를 순식간에 청산하지 못합니다. 타락은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복귀는 순식간에 청산하지 못합니다. 타락은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복귀는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발전해 왔고 그에 따라 인간의 심령과 지능도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100년 전 사람보다 오늘날의 우리가 더 많은 시대적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넷째,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해야 합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섭리도 그와 같은 원리에 따라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 완성해야 합니다.

 

        2) 지상인의 부활섭리         

 하나님의 부활섭리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병원에 가면 번호표를 뽑아서 진료를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립니다. 자기 차례가 와야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응급환자는 번호표를 뽑지 않아도 됩니다. 응급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전문의가 모두 동원되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달라붙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섭리를 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응급환자와 같은 지상인을 먼저 구하기 위해 섭리하십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해서 생기고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생길 수도 없고 성장하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열매가 나무에 달려서 자라고 익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영인체도 육신을 쓰고 성장·완성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쓰고 있는 지상인의 부활섭리가 제일 시급한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 간 영인들의 부활도 급합니다. 대부분의 영인들이 오래 전에 영계에 가서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해방의 한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시급한 것은 지상의 육신을 쓴 사람입니다.

 

육신을 쓰고 있는 사람은 단시일에 이 지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축복을 받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에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계에 간 영인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시간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영인들이 고통에서 해방받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지상에 있는 사람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지상인의 부활섭리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부활기대(復活基臺)를 먼저 세워야 합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집터를 닦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섭리하실 때에도 먼저 기대(基臺)를 세워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의 구약 이전 역사는 부활하기 위한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입니다.

 

부활기대섭리시대에는 말씀을 대신해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만물보다 못한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인간을 지었는데,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 못한 소생기 이전의 기준선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원리가 없는 무원리권(無原理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원리가 없는 무원리권에서 하나님이 창조하던 당시의 기준까지 올라가는 데 무려 20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이 아담에게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의 구약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해서 성장하고 완성하는데, 소생부활섭리시대에 율법을 믿고 산 사람의 영인체는 영형체(靈形體)를 이루게 됩니다. 영형체를 이룬 사람이 육신을 벗고 영계로 가면 영형체급영계(靈形體級靈界)에 머뭅니다.

 

소생부활섭리시대를 행의시대(行義時代)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믿고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행하면서 의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2000년의 신약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에 신약을 믿고 성장한 사람의 영인체는 생명체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낙원에 머물게 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 합니다. 정성부활섭리시대에 신약을 믿고 성장한 사람의 영인체는 생명체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낙원에 머물게 됩니다.

장성부활섭리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고도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의시대에는 유대 민족처럼 율법으로 훈련된 터전에서 행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의롭게 됩니다.

 

신의시대의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 하는 부자의 관계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이 신·구약성서의 핵심입니다. 그 말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왕의 왕으로 섬겼다면 당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땅위에 창건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림주 이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완성하는 성약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 합니다. 완성부활섭리시대에 재림주를 모시고 섬기면 그 사람의 영인체는 생령체(生靈體)를 이루게 되고, 영계로 가면 천국(天國)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완성부활섭리시대를 시의시대(侍義時代)라고도 합니다. 모심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의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과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전체 말씀을 행하고 믿는 기대 위에서 재림주를 잘 모셔야 의롭게 됩니다.

 

 행의시대와 신의시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행의시대에 아무리 잘 행해도 장성부활섭리시대와 같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완성부활섭리시대와 같은 혜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낙원과 천국이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낙원과 천국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낙원은 원죄가 있고 미완성되어도 개인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가정단위로 가는 곳이고, 원죄가 없고 완성되어야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원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의 원죄를 청산하기 위해 오셨는데 왜 천국이 아니라 낙원에 가셨느냐? 예수님은 개인완성을 실현했지만 가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한 심정적 인연을 가지고 참사랑을 실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부의 사랑을 가지고 왔지만 실제로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고,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왔지만 자녀를 낳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유대 민족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이고, 심정의 세계인데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이 땅에서 그런 생활을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가지를 못하고, 낙원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세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      

 말세에는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선지자 요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서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는 예언입니다(요엘 2장 28절 참조).

말세에는 인간 조상이 타락하기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때를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시대이므로 ‘너는 주다.’하는 계시를 많이 받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장성기완성급에서 타락하여 만물을 주관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이 발전해서 타락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면 ‘너에게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의 자리에 섰다고 해서 ‘너는 주다.’ 하는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또 재림주님이 오시면 그 분 앞에서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하는 시대적 사명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너는 그 분야에서 주다.’하는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재림주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도 비참해지고, 자기 가족도 패가망신하고, 영계에 간 자기 일족까지 전부 비참해집니다. ‘너는 주다.’하는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를 재림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도 있습니다. 각자의 심령 기준에 따라서 통하는 영계는 각각 다릅니다. 영계는 방대합니다. 그 방대한 영계를 모두 통한 사람은 없습니다. 영계를 모두 통한 분은 오직 참부모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원리의 본체이시고, 참부모님은 그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님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지상의 인간들은 복귀섭리의 혜택에 따라 심령과 지능이 발달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면 그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계를 자기가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아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 일의 종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횡적인 관계는 모릅니다. 그래서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분야에서는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사명 분야에서 제일이라는 뜻이지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네가 제일이다.’하는 계시를 받으면 독선적이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통인끼리 종종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영통한 사람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심각합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영통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영통인들끼리 자기가 최고라며 혼란이 벌어지고 많은 시련이 있는 것도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한 분야만 놓고 보면 제일인 것 같지만 횡적으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 싸우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과 원리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신령도 있고 진리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정적인 분야도 지니시고, 원리적인 분야도 지니고 계십니다. 원리는 원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 속에는 창조의 동기인 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정을 떠난 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심정을 떠난 규범도 없습니다. 심정을 떠난 질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원리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 첫째 부활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14만 4천인은 ‘사람 가운데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로서 그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요한계시록 14장 4절과 5절)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무리가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14만 4천인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14만 4천 명에 해당한다면, 그 숫자는 이미 다 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만 해도 목사의 수가 4만 명이 넘습니다. 정목사만 4만 명이니, 부목사까지 합치면 10만 명이 넘습니다. 미국은 교회가 33만개이고, 목사만 33만 명이 넘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성직자들은 전부 합치면 이 지구상에 수억 명이 넘는 기독교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14만 4천인은 첫째 부활에 들어가는 문자 그대로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복귀섭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재림주를 만나서 처음으로 원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의 자아를 복귀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14만 4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먼저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노아까지 10대를 거치면서 탕감복귀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둘째아들 함이 실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다시 10대를 거쳐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거기에서 10대를 거쳐서 소생(아담)·장성(노아)·완성(아브라함)의 모든 섭리를 완성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실수로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섭리가 연장됩니다.

 

12대만에 비로소 야곱의 가정에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믿음의 기대오 실체기대를 완성합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메시아가 아브라함가정의 후손에서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아들 열둘을 낳습니다. 12명의 아들은 종적인 12대를 횡적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는 종적인 12수와 횡적인 12수를 입체적으로 나타낸 수입니다(12x12=144). 144수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 수 있는 기대가 비로소 형성되는 것입니다. 뒤에 붙은 000은 소생·장성·완성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부활에 들어갈 사람은 14만 4000무리는 수리적인 숫자가 아니라 섭리의 뜻이 담긴 숫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들어갈 사람은 가장 먼저 재림주를 만나서 원죄를 청산하고 보다 성숙된 자리에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첫째 부활에 참여할 14만 4000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를 만나서 원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서 완성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첫째 부활에 들어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