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2

2013. 1. 6. 20:40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섭리는 완성되었는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섭리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야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24절을 보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또 요한1서 1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몸과 마음의 갈등이 생겨날 수 없고, 타락으로 생겨난 원죄가 청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섭리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직도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도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기도가 필요 없고, 신앙이 필요 없고, 메시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도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을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후손에게도 신앙생활과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섭리의 목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정사실인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임신을 하면 아무리 가난하고 못살더라도 미리 출산 준비를 합니다. 누더기를 잘라서라도 아기 옷을 만들고 아기 이불을 만들면서 어머니는 아기를 위한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도 4000년 간 타락한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인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서 개인·가정·종족·민족을 준비했습니다. 모세에게 애급에서 고역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런 준비를 거쳐서 형성한 민족이 유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해서 유대교를 세우고, 유대교의 지도자로 제사장·율법사·서기관을 세웠습니다. 메시아를 보낼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기 위하여 대제사장 사가랴 가정과 요셉 가정을 택했습니다. 레위 지파인 사가랴의 종족에는 세례 요한을 보내고, 다윗 지파인 요셉 종족에는 마리아를 통해 예수를 보냈습니다.

 

이 두 종족이 하나 되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모셨다면, 유대 민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 민족을 잘 믿고, 잘 받들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시켜서 메시아를 보냈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 세계이기 때문에 준비하지 않고 메시아를 보내면 그를 죽입니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한복음 6장 28절)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장 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말씀마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이단으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 할지라도 그 일을 믿어라.’(요한복음 10장 37~38절)고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믿게 하려고 많은 이적(異跡)을 행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꼽추가 허리를 펴고,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역사를 하며 유대인들이 믿어주기를 바랐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정죄(定罪)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異跡)과 기사(奇事)를 보고 더러운 귀신이 붙어서 저런 역사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권능(權能)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주어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고, 권능을 베풀어도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38절까지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44절까지를 보면, 예수님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며 분노를 토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해 많이 예언했지만, 오신 메시아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한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한복음 5장 43절)는 말씀을 했고,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한복음 5장 46~47절)는 말씀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의 이름으로 왔으면 존경하고 믿었을 텐데,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고 하니까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 반대하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않았으리라.’(마태복음 23장 29~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장 2절)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하고 유대 민족이 비참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열매가 있을까 하여 나무에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다고 마태복음 2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하듯이 무화과나무는 유대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것은 유대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면 예수님을 빨리 죽도록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은 30냥에 팔았는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칭찬하기는 커녕 저주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는 것이 뜻이라면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한 가룟 유다가 가장 사랑받고 가장 먼저 천국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번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읽으면서도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와 예수님의 언행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죽기 직전에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장 60절).

 

또 사도행전에서는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가 전하는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장 52~53절)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오리라 예고된 의인을 잡아 죽였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었고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유대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율법에 능통하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과 2절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을 멈추지 않았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데려가려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그가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쳤습니다.

 

그리고 ‘사울아(후에 바울로 개명)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장 4절)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영적으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바로 마음을 돌이켜 먹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통치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한탄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 말씀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옳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불신했고, 사가랴 가정에서 불신하고, 요셉의 가정과 종족이 불신했습니다. 메시아를 맞도록 준비했던 단체와 종교, 그리고 준비했던 지도자가 모두 불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발붙일 곳 없는 외롭고 슬픈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