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 1

2013. 1. 6. 20:41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제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2000년 전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는데, 33세에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서 4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서론              

 메시아는 히브리말로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특히 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10장 1절을 보면,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장면입니다.

 

또 사무엘상 16장 13절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悖逆)하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세울 때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메시아의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를 보낸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메시아 사상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도들이 메시아를 크리스토스(christos)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가 나온 것입니니다.

 

        1. 십자가에 의한 구원섭리             

 2000년 전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는데, 33세에 유대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서 4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개척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출발할 때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거짓을 말하는 참칭자(僭稱者)라며 처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다가 붙잡히면 옥에 갇히고, 사자의 밥으로 던져지고, 불과 기름에 타죽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독교가 출발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간을 대신해서 고난의 길을 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그 보혈로 인간의 죄를 대속해줬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관입니다.

 

그러나 ‘통일원리’의 관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로 오셨는데,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난의 주가 되었다는 입장입니다. 사도 바울의 십자가를 내세운 신앙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난의 주’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을 정립한 것이 그대로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13권을 사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신학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없었으면 구원이 없다. 십자기에 매달려 흘린 예수의 피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2000년 간 이어져온 기독교의 신앙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을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統治者)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대 민족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았더라면 만왕의 왕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 강림의 목적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려던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창조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목적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하신 3대축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생육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 곧 신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요한복음 14장 20절),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고린도전서 3장 16절),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그렇게 신성을 지닌 다음 부부를 이루어 땅에 충만하도록 자손을 번식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또 땅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3대축복이 이루어진 세계에는 원죄가 없습니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와 신앙이 필요 없고, 구세주도 필요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지상천국이며 천상천국입니다.

그런데 아담·해와가 하나님 말씀을 불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담·해와는 3대축복을 잃어버리고 사탄의 성품, 곧 악성(惡性)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담·해와는 사탄과 일체를 이루고, 사탄이 거하는 전(殿)이 되었고, 완전성을 잃은 타락인간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사탄을 중심으로 거짓된 개인·거짓된 부부·거짓된 부모가 되어 거짓된 자식을 낳았습니다. 아담·해와의 가정은 사탄의 거짓된 사랑·거짓된 생명·거짓된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 가정의 중심에는 사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가정은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세계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는 곳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신이 되고 인간은 사탄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탄식하시고, 인간도 탄식하고, 만물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과 6절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으로 자녀를 잃어버린 것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성구에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양자라도 되고 싶어 하는 성도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로마서 8장 19절에서 22절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완성한 인간의 주관을 받고 싶어 하는 만물이 주인을 잃고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담·해와의 타락이 초래한 비극적인 상황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고, 회개와 기도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구세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사회·민족·국가·세계로 확대된 것이 지상지옥과 천상지옥입니다. 그런 세계는 하나님이 생각지도 않았던 세계입니다. 지상지옥과 천상지옥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아담을 통해 이루시려고 했던 창조 이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