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2장 타락론 - 1

2013. 1. 6. 20:49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제2장 타락론

 

봄 동산에 돋아나는 풀은 잎을 다 뜯어버려도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새싹이 계속 돋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죄를 싫어해서 없애려고 하지만, 죄는 돋아나고 또 돋아납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서론

 인간은 누구나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따르려는 본심의 지향성(指向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악의 세력에 몰려 본심이 원하지도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악의 주인을 사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인간은 뱀으로 표현된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원죄(原罪)를 가진 사탄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사탄의 주관하에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은 세상의 거짓된 신이 되고 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타락론에서는 죄의 뿌리(原罪), 사탄의 정체, 타락의 동기와 경로, 타락의 결과,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행위를 갆섭하지 않으신 이유 등 타락과 죄의 근본문제를 구명할 것이다.

 

                    1. 죄의 뿌리

 봄 동산에 돋아나는 풀은 잎을 다 뜯어버려도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새싹이 계속 돋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죄를 싫어해서 없애려고 하지만, 죄는 돋아나고 또 돋아납니다. 그것은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인류 최초의 죄를 거론한 것은 성서입니다. 성서의 창세기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그 성구대로라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죄의 뿌리, 곧 원죄(原罪)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으려면 먼저 선악과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놓고 많은 사람(기독교인)이 문자 그대로 과실이라고 주장합니다. ‘선악과’의 ‘과’자가 열매 ‘과(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잘 분석해 보면,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의 과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에덴동산에는 아담과 해와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나님이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신 계명을 어기고 굳이 그것을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에 있는 것도 아닌데, 죽음을 무릅쓰고 따먹은 것이 과일이라면 그것은 납득이 안 됩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지, 죽기 위해서 먹지 않습니다. 따먹으면 죽는 줄 알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9장 25절에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목숨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어떤 과일도 천하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생명 이상의 가치를 지닌 어떤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 15절의 예수님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서에는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다(창세기 3장 6~7절)고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만일 선악과가 나무의 열매였다면, 틀림없이 손으로 따서 입으로 먹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선악과가 먹는 과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선악과는 문자 그대로 복숭아나 포도나 사과와 같은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해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주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의 성숙 여부를 시험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걸고 자식을 시험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 아니하고···.’(이사야 42장 1~3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놓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가 그렇게 자애로운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무자비하게 인간을 시험할 분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자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면 그 책임은 부모가 져야 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부분은 모두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뿌리가 된 선악과도 비유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선악과가 과일이냐, 아니냐를 놓고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는 어떤 한 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역사 속의 갈등과 대립을 야기한 근원적 문제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의 근본 문제를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악과에 대한 문제가 확실히 밝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하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해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용서는 커녕 에덴동산에서 곧바로 추방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1)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과일은 나무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고, 배는 배나무에서 열립니다. 따라서 선악과는 선악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2장 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해와가 있고 또 간교한 뱀이 있었는데 뱀이 해와를 꾀어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고 탐스러운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를 밝혀야 선악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서 66권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세기 2장 9절에 단 한번 나옵니다. 그 방대한 말씀 속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언급은 그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범인을 잘을 때 단서가 많으면 범인을 쉽게 빨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용의자라 하더라도 본인이 범행을 부정하고 단서가 없으면 무혐의로 처리됩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죄를 입증할 수 있는 단서 확보가 필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죄의 근원자(根源者)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딱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그 나무에 대해서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변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 있었고, 거기에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해와가 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곳에 같이 있던 생명나무를 통해 그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 곁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정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신·구약 성서에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기를 소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잘 커서 훌륭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망에 부합해서 커야 합니다. 부모의 소망과 자식의 소망이 같아야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것이 소망이라면, 하나님의 소망도 아담이 생명나무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12절에도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 소망이면서도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아들을 보내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을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고, 구약시대 성도들의 소망도 생명나무였고, 신약시대 성도들의 소망도 모두 생명나무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을 보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에덴동산의 아담이 소망하던 생명나무와 지금 우리가 소망하는 생명나무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아담을 비롯하여 신·구약 성도들이 그토록 소망한 생명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가 됩니다.

잠언 11장 30절을 보면,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5장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로마서 11장 17절에는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볼 때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비유한 포도나무나 감람나무처럼 사람을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기록된 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소원이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으니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 곧 아담을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 곧 해와를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가 선악과라면, 그 선악과는 해와의 어떤 열매일 것입니다. 열매는 사랑의 결과를 말하므로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 즉 해와의 정조입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는 정조가 생명보다 귀합니다. 과거 한국의 여성들은 정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여자들은 사춘기가 지나면 은장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자기의 몸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정조는 여자에게 있어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결실하고 열매를 통해서 번식합니다. 마차가지로 사람도 사랑의 열매인 자식을 통해서 혈통이 계승되고, 사랑을 통해서 결실을 이룹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완성한 해와이고, 그 나무에 달린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은 해와의 사랑을 유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새 젊은 처녀 총각들이 만나서 “너 요새 여자 친구 만나던데 따먹었느냐?” 라는 말을 하고 다닙니다. 세상에서 따먹었다는 말은 여자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말입니다. 따먹었다는 말은 6000년 전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사탄이 해와의 사랑을 유린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따먹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때가 되면 따먹을 수 있지만, 때가 되기 전에는 따먹으면 안 됩니다.

 

해와는 자기 책임분담에 의해서 사랑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면, 해와가 사춘기를 지나 성숙했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 축복의 대상이 아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해와는 선한 나무가 됩니다. 선한 나무에서는 선한 열매가 열립니다. 그것이 영원한 선입니다.

 

해와는 자기의 행동 여하에 따라 선한 나무도 될 수 있고, 악한 나무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중심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남자는 모두 생명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생명나무로 비유됩니다. 여자는 원래 선한 나무로 태어나지만 성장 과정에서 잘못되면 악한 나무가 됩니다.

 

남자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가 아기 때부터 생명나무의 사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춘기가 지나야만 생명나무로서의 사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따먹으면 안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여자는 밭이라고 합니다. 해와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의 씨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켰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의 공주가 있는데, 그 공주가 다른 나라의 왕자와 관계를 맺으면 그 공주는 왕자의 신부가 되고, 왕자의 자녀를 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가 어느 날 강도에게 몸을 빼앗겼다면 강도의 부인이 되고 그 씨를 받으면 강도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해와는 자기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서 선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악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생명의 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성장하면 하나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를 번식해야 하는데, 사탄의 몸이 되어 사탄의 자녀를 번식했습니다. 왜냐하면 해와가 먼저 타락해서 나중에 아담까지 타락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죄악을 번식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결론은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아담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해와이고,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 즉 해와의 정조를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해와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