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16

2013. 1. 6. 20:50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8.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는 형체도 있고 실체도 있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고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형실체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인간을 중심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없으면 두 세계는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라고 했습니다.

 

  1) 무형실체세계의 존재 여부          

 무형세계(無形世界)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대단히 궁금한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무형세계의 존재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형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무형실체세계라고 한 것입니다.

 

무형실체세계를 놓고 ‘무형세계’라고 하거나 ‘천상세계(天上世界)’ 또는 ‘영계(靈界)’라고 하는 등 저마다 달리 표현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실체세계를 놓고도 ‘유형세계’, ‘지상세계’ 또는 ‘육계(肉界)’로 저마다 달리 표현하지만 그것도 같은 말입니다.

 

흔히 영계는 죽어서 가는 세계, 즉 ‘사후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계를 사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영계는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그 세계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영계는 육계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계는 보이고, 영계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영계와 육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바로 놓았을 때는 손등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손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등과 손바닥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손등과 손바닥 둘을 합해서 손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에는 보이는 육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영계가 있는데, 그 두 세계는 하나입니다. 두 세계를 합해서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영계는 존재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세계를 없다고 부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질리라면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합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영계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영계가 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1) 창조원리로 보아

 하나님의 창조를 볼 때 무형실체세계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피조세계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신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해서 삼라만상을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확대해 놓은 것이 우주입니다.

 

인간의 보이는 몸을 확대해 놓은 것이 유형실체세계입니다. 유형실체세계는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유형이고 실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자연계, 또는 지상계라고 합니다.

 

한편 인간에게는 몸의 주체가 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를 확대해 놓은 것이 무형실체세계입니다. 마음이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듯이 무형실체세계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합니다.

 

마음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습니다. 무한히 커질 수도 있고 무한히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의 세계를 무형실체세계, 곧 영계라고 합니다. 영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천주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도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을 본(本)으로 해서 지어 놓은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의 두 세계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구조적으로는 마음과 몸으로 구분되지만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형실체세계와 무형실체세계도 두 세계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묶어서 천주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창공을 하늘이라 하고 두 발을 딛고 사는 곳을 땅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천지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天)은 영계를 뜻하고 지(地)는 육계, 곧 자연계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영계와 육계, 곧 천주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영계와 육계의 관계성을 볼 때 영계는 무한한 세계이고, 지상세계는 유한한 세계입니다. 영계는 영원성을 가졌고, 지상세계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100년을 산다면 100년은 영원한 세계인 영계에 비해 수억만 분의 1초도 안 됩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육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원인의 세계는 시공(時空)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의 세계는 그것이 실체로 전개되어 나왔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형실체세계는 한계가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런데 주체인 무형실체세계는 한계가 없습니다. 거기는 무한하고 영원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무형의 실체로 계시고, 기뻐하시기 위해서 모든 존재를 지었습니다. 실체를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무형의 실체로 계시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유형의 실체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이라는 실체는 한계성을 갖기 때문에 영원성을 지닌 영인체를 인간에게 부여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지상에서 영인체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며 산 사람은 영계에 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과 미를 돌리는 효자와 효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지상천국이고 천상천국입니다. 천국이라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중심은 부자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근본 요소는 참사랑인데 거기에서 효도가 나옵니다. 효도는 심정을 뿌리로 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끝이 없습니다. 효도 자체가 한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고도 더 주고 싶고 효도를 하면서도 더 기뻐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동기가 심정입니다. 기쁨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그 기쁨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중구조로 지었고, 그 인간을 확대해서 전개시킨 세계가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입니다. 두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천주(天宙)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주라는 개념밖에 없어서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표현했습니다. 우주라는 말은 원리로 볼 때 보이는 세계만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주와 똑같은 무형의 우주인 무형실체세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소천주(小天宙)라고 해야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가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형실체세계도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림자는 실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닙니다. 실체와 그림자가 하나 되는 자리가 정오정착(正午定着)입니다.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의 두 세계를 천주라고 했을 때 인간은 천주의 중심 존재입니다. 인간이 제외되면 천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가치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두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천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절대적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천주총합실체상(天宙總合實體相)입니다. 육신은 유형실체세계를 총합·축소한 실체상이고,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의 모든 요소와 속성을 총합한 실체상입니다. 인간 개체는 영인체와 육신으로 되어 있으니 인간은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인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두 세계를 화동시키는 중간매개체(中間媒介體)요, 화동(和動)의 중심체(中心體)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하면 두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와 주고받고, 육신은 유형실체세계와 주고받으면서 인간 자체의 영인체와 육신이 주고받으니 결국 인간은 두 세계를 화동시키고 매개하는 존재입니다.

 

무심코 보면 공간 자체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구 주변에는 공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공기가 없으면 생명체는 하나도 존속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는 있습니다. 공기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기파도 가득 차 있습니다.

 

지구상의 크고 작은 나라는 다 방송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TV방송국도 있고 라디오 방송국도 있습니다. 각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뉴스나 어떤 가수의 노래가 전파로 바뀌어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습니다.

한국의 KBS·MBC, 일본의 NHK, 미국의 CNN 등 방송 매체들은 쉬지 않고 그런 전파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서 라디오나 TV가 그 전파를 소리나 화상으로 바꾸어 시청자의 귀나 눈으로 전달하는 중간매개체의 역할을 합니다. 주파수를 맞추면 영상과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두 세계를 화동시키고 연결시켜 주는 중간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파수를 맞춰서 TV를 시청하는 것처럼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맞춰서 볼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세계를 총합하는 실체상도 되지만, 두 세계를 화동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셋째로 인간의 위치는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두 세계의 주관주(主管主)입니다. 따라서 천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천주총합실체상이자 중간매개체이고 두 세계를 주관하는 주관주입니다.

유형실체세계는 육신을 확대한 세계이기 때문에 육신은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고, 무형실체세계는 영인체를 확대한 세계이기 때문에 영인체는 무형실체세계를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육적오관(肉的五官)이 있습니다. 영적오관이 있기 때문에 영인체가 성장해서 완성하면 무형실체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계에서도 볼 수가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맛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세게를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영인체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합니다.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가면 영인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 안에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잘 모릅니다.

 

지상에서 육신을 지니고도 가끔 자기의 영인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언제나 영인체가 자기 자신보다 앞서 간다고 합니다. 영인체는 선하고 의로운 것을 찾아가려고 하지 나쁜 것을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악령들이 있으면 벌써 영인체가 느끼는 것입니다. 육신에 소름이 돋는다든가 무엇에 깜짝 놀라는 자극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인체가 육신의 주체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영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사랑은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훈련을 통해 완성해야 합니다. 영인체가 가서 살 수 있는 천국은 선한 세계요 사랑의 세계이니, 육신 쓴 지상의 가정에서 사랑을 완성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천주의 핵심입니다. 가정에서 사랑과 심정의 훈련을 받지 못하고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생활할 수 없습니다. 영인체가 사는 곳은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 지상생활이 중요합니다.

 

나무로 말하면, 육신은 줄기와 가지 또는 잎과 같고, 영인체는 가지에 달려 있는 열매와 같습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서 완숙해야 떨어집니다. 육신은 노쇠하면 흙으로 가고 열매와 같은 영인체는 하나님 앞으로 가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9절과 마태복음 18장 18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사랑에 의해 태어나서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으로 완성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기 위해서 결혼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참사랑의 완성자입니다. 참사랑의 완성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참사랑의 완성자가 되었을 때 그 영인체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가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지면 그 열매는 창고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진 과일은 쓰레기통에 버려집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육신을 지니고 영인체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인체는 하나님이 원래 소망했던 세계, 천국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쓰레기통으로 간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원리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가 없습니다.

 

자녀가 본연의 자리에 서지 않는 한 하나님도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자녀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복귀섭리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만나 사랑하며 사는 곳에서는 사랑이 꽃피고 열매를 맺어서 완숙해야 합니다. 사과를 보면,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 속에 있는 작은 씨방이 점점 자라서 커집니다. 조그마한 씨방이 꽃잎 속에 있다가 자라나 큰 사과가 됩니다. 그 사과가 다 컸다고 해서 완숙한 것이 아닙니다. 따먹어 보고 맛이 없으면 쓰레기통에 버리게 됩니다.

 

겉모습은 갖추었더라도 사과의 맛이 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성장했더라도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아들딸의 맛이 들어야 합니다. 그 맛이 사랑의 인간입니다. 사랑의 인간은 아버지 앞에 효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효도는 사랑의 향기입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심체이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가정을 중심한 삶은 사회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확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 대기소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완숙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열매가 다 커서 완숙한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쭉정이는 못 들어갑니다. 열매가 다 컸다고 해서 쭉정이가 아니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 컸더라도 완숙하지 못한 열매는 쭉정이입니다.

 

벼껍질 속에 달콤한 물이 들어 있지만, 그 달콤한 물이 완숙하지 못하면 벼껍질은 말라서 쭉정이가 됩니다. 바람결에 날아갑니다. 열매가 될 요소는 다 마련하고 있더라도 벼껍질의 운명은 그 요소를 완숙시켰느냐 완숙시키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 속에는 영인체가 있습니다. 그 영인체를 완숙시켰느냐, 완숙시키지 못했느냐의 문제는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의 생활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영계에 가면 지옥의 맨 밑창에는 음란한 사람이 갑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생식기를 자기 마음대로 굴렸기 때문에 지옥의 맨 밑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명을 함부로 취급한 사람이 갑니다. 자살한 사람, 남의 생명을 죽인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자살하면 안 됩니다.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이 땅에서 육신을 지니고 완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인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발도 붙일 수 없습니다.

 

(2) 성서로 보아           

 성서로 봐도 영계가 있습니다. 영계가 없다면 영인체를 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인체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육의 몸이 있고 신령한 몸이 있으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육은 보이는 육신을 말하고, 신령한 몸은 원리로 말하면 영인체입니다.

 

육신의 생활은 전부 영인체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육신의 생활 전체가 그대로 속사람 영인체에 심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인체에 대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지 신령한 몸은 바로 영인체입니다. 앞에서 지상생활이 영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의 몸에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는 말은 육신과 영인체의 삶이 일체가 되는 생활을 뜻합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흙의 요소이기 때문에 노쇠하면 흙으로 가지만, 속사람인 영인체는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완성해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서 10절에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약 1600년 전에 죽은 사람이고, 엘리야는 예수님보다 900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900년 전, 1600년 전 사람과 예수님이 지상에서 대화했다는 것은 육신은 없어졌지만 엘리야와 모세의 영인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사도행전 9장 4절에 보면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는 예수님이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셔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계의 예수님이 실체를 지닌 요한과 영적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모두가 영계의 실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의 3단계 생활      

 인간은 모태에서 태어나서 지상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영계에 가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3단게로 되었고, 3단계로 완성합니다.

 

(1) 모태생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서 자녀가 생깁니다. 아버지의 생명의 씨가 어머니의 난자와 만나서 성장합니다. 태아는 열 달 동안에 복중에서 지상생활을 준비합니다. 태아가 지상에 나와서 살 수 있도록 복중에서 모든 기능을 갖추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열 달입니다. 그 기간 동안 태아는 태반을 통하여 모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배출합니다. 거기에서 태아가 주체이고 태반은 대상입니다.

 

뱃속의 태아는 양수(羊水)라는 물속에서 성장합니다. 양수가 부족하면 아기는 살길이 없습니다. 복중에 있는 아기는 물속에서 완성됩니다. 태내의 생활은 수중생활입니다. 태아는 수중생활에서 10개월 동안 지상생활을 준비합니다.

 

(2) 지상생활           

 태아가 완성되면 양수가 먼저 터집니다. 양수가 터지면 아기가 나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도 하나님이 지으신 설계도와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뱃속에 있던 태아가 완성되어 밖으로 나오면 아기를 키운 태반은 흙으로 돌아가고 지상에서는 아기만 성장하게 됩니다. 아기가 뱃속에서 나오면서 지상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육신과 영인체를 지닙니다. 육신이 생기는 그 시간에 영인체도 같이 형성되어 출발하는 것입니다. 육신에는 육심(肉心)이 있고 영인체에는 생심(生心)이 있는데, 육심과 생심의 수수작용으로 육신과 영인체는 성장합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지상에서 생활하는 기간을 100년으로 잡는다면, 공기환경(空氣環境)에서 이루어지는 지상생활 100년은 영계생활의 준비기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아기로 태어나서 부모의 슬하에서 사춘기를 거치면서 개성을 완성하고 결혼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계가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참사랑을 완성하고 사대심정권을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성완성은 절대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함축해서 말하면 절대성을 지켜서 완성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개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먼저 인격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책임분담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성한 다음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입니다.

 

반쪽이 또 하나의 반쪽을 만나 온전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해방해 드리기 위해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번식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온전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같이 온전한 영인체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온전한 영인체가 되어 영계로 들어가려면 여자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의 양성과 음성, 그리고 성상과 형상이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되어 나온 남자와 여자도 하나님 안으로 돌아갈 때는 부부가 되어 통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가치를 놓고 볼 때 결혼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성하면 자기도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완성되겠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만난다면 상대가 그 자리에 서 주지를 않습니다.

 

상대가 없으면 자기도 완성이 안 되고 상대도 완성이 안 됩니다. ‘상대를 위해서 내가 결혼한다, 상대를 완성시키려고 내가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도 완성하고 나도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역설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장 11절)고 했습니다.

 

지상생활 100년은 육신을 쓰고 영인체를 완성하는 기간입니다. 복중에서 태반을 통해 아기가 완성해 나오는 것처럼 지상생활은 참사랑과 4대심정권을 완성하여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영계 생활의 준비 기간입니다. 완성하려면 성장기간에 완숙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완성 속에는 완숙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3) 영계생활           

 지상에서 참사랑과 4대심정권을 완성한 다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가면 그 영인체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 세계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영계에 가서도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사랑을 그끼고 체휼하며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자기의 기준에 맞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모습이 되어 영계로 갈 때 치르는 의식을 장례식(葬禮式)이라 하지 않고 성화예식(聖和禮式)이라고 합니다. 장례식과 성화예식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 성화예식이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 장례식입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에서 22절까지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은 자’는 제자 아버지의 시체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친척이나 동네 사람도 죽은 자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제자 아버지의 시체도 죽은 자라 했고, 동네 사람도 죽은 자라 했습니다. 죽음의 개념을 두 종류로 분류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 앞으로 보내는 의식이 장례식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사망의 주인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던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 육신은 죽었지만 영인체는 살아 있습니다. 그 영인체는 영원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를 영계로 보내고 육신은 땅에 묻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축복가정이라면 그건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성화예식은 산 자가 산 자를 생명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이고, 장례식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사망의 주인에게 보내는 의식입니다.

 

성화예식이란 영계에 갈 때의 예식만이 아닙니다. 기원절부터는 참부님은 승리권의 은사로 말미암아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참생명의 인간으로 생기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참부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전체의 과정을 총정리하는 예식을 성화예식이라 합니다.

 

성화예식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열 달이나 백 년이 아니라 영생하게 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영원히 감사하면서 사는 천국입니다. 천국에서는 상충과 고통이 없습니다. 상충과 고통이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사는 동안 상충과 고통을 다 씻어내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양수 속과 공기 속의 삶을 마치고 완성한 모습으로 영계에 가면 사랑 가운데(=愛中)서 살게 됩니다. 사람은 수중(水中)·기중(氣中)·애중(愛中)에서 생활합니다. 사랑으로 생기고,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완성해서 사랑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의미합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났다는 자체가 죽음을 전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잘 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만, 잘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잘 죽을 수 있는 자리를 택해 놓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인생을 잘 살다가도 끝맺음을 잘못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맺음과 결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생활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똑같아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화예식은 죽었을 때 했습니다. 참부모님은 이제 성화예식은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타락해서 죽은 자가 되었고 원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생(重生)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복중에 생길 때부터 사탄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주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혈통을 되찾아 지상에서 무형의 참부모님과 실체의 참부모님을 생활의 주인으로 모셨다면 영계에도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지상생활이 곧 영계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살다가 죽을 때 성화예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중생하고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부활하고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성화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영계에 들어갈 때 자동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혈통을 하나님의 혈통으로 바꾸어야 성화예식을 할 수 있습니다. 혈통을 바꾸는 것이 성주식이고 축복식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육신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됩니다. 축복가정들은 육신을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지 않습니다. 완성하지 못하고 영계에 갔을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열매가 나무에서 완숙해야 하는데 완숙하지 못하고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나무에 붙어서 완숙해야 하는데 나무가 없으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영인체가 육신에 미련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육신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당을 잡아서 묻어줘야 합니다.

 

풍수설에는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이 있습니다. 양택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집을 말하고, 음택은 죽은 후에 육신이 묻히는 곳을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좋은 음택을 골라서 조상을 모셨습니다. 조상의 묘를 좋은 곳에 잘 쓰면 후손이 잘 되고 조상의 묘를 잘못 쓰면 후손이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 자연과 만물세계를 지을 때 모두 서로의 형상을 닮게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산이나 들도 그 지형이 어떤 것은 닭을 닮았고, 어떤 것은 소를 닮았으며 어떤 것은 토끼를 닮았고, 어떤 것은 봉황을 닮았습니다. 그 지형 가운데 제일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00점짜리 명당에 50점밖에 안 되는 사람이 들어간다면 그 후손은 망합니다. 주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준비된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육신과 영인체의 구조 및 상대적 관계       

 육신(肉身)은 육심(肉心)과 육체(肉體)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육심은 육신의 마음에 해당하고, 육체는 육신의 몸에 해당합니다.

영인체도 생심(生心)과 영체(靈體)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생심은 영인체의 마음에 해당하고 영체는 영인체의 몸에 해당합니다.

 

육신은 외부에서 무형의 공기나 빛을 통해 양적(+)인 영양소를 받고, 유형의 음식물을 통해 음적(-)인 영양소를 섭취하는 동시에 자체에서는 육심과 육체가 수수작용을 하면서 성장합니다.

영인체도 육신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양적인 영양소와 음적인 영양소를 받고, 자체에서 생심과 영체가 수수작용을 하면서 성장합니다. 생심과 영체가 수수작용을 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생소(生素)라는 양적인 요소를 받고,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生力要素)라는 음적인 요소를 받아 성장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생소는 원리와 사랑이고, 생력요소는 육신이 조성한 생명의 힘 곧 원리를 생활화한 인격입니다.

 

영인체와 육신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영인체가 주체이고, 육신은 대상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영인체는 육신이 주는 생력요소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생소를 받으면서 성장하는데, 성장하면서 육신에게 다시 생령요소(生靈要素)를 돌려줍니다. 생령요소는 육신을 통해 인격을 생활화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생령요소는 양적인 요소가 되고 생력요소는 음적인 요소가 됩니다. 영인체와 육신이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를 주고받음으로써 인간은 육신을 쓰고 영인체를 성장시킵니다.

 

모든 존재의 성장과 완성은 소생기·장성기·완성기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을 지니고 자라는 초기, 즉 소생기의 영인체는 영형체(靈形體)라 합니다. 영형체는 영형체급 영계에 갑니다. 그 다음에 장성기의 영인체는 생명체(生命體)라 합니다. 생명체가 가는 곳은 낙원입니다. 그 다음에 완성기에 영인체인 생령체(生靈體)가 되면 천국에 갑니다.

 

낙원과 천국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주님이 계신 곳은 초막이든 궁궐이든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천국을 보기 때문에 낙원과 천국은 다릅니다. 낙원은 원죄를 가지고도 갈 수 있고, 미완성해도 갈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원죄가 없어야 갈 수 있고, 영인체가 완성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천국의 기본단위가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어야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국으로 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오른편 강도에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장 43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됐지만 천국 생활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천국은 사랑이 완성된 세계, 심정이 완성된 세계인데 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은 사랑을 해보지도 못했고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형제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고, 선민이라는 유대 민족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만나서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과 심정의 세계인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고 오른편 강도에게 “나와 같이 낙원에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천국이라는 개념은 원리적 개념과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본 천국은 원죄를 갖고는 갈 수가 없으며, 가정단위로 가는데 완성한 영인체가 가는 곳입니다.

 

인간의 영인체는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에만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만약 영인체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육신을 잃었다면, 그 영인체는 지상의 후손이라든가 자기의 성품과 소질이 맞는 사람의 육신을 빌려 그의 영인체와 함께 성장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육신을 지닌 시간이 대단히 귀중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체휼하고 완성하고 나서 영계로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구상하신 인간 창조의 설계도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영인체의 완성입니다. 영인체의 완성은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생심의 완성이요, 생심의 완성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의 완성입니다. 심정의 완성은 참사랑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소망이신 인격 완성입니다. 심정의 완성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고 절대성을 완성한 터전에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성을 지켜 참혈통의 전수(傳受)가 완성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육신을 쓰고 생령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완성은 심정 완성과 절대성 완성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부터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전수되고 상속됩니다. 영인체의 완성은 바로 인간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육신생활을 통해서 영인체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목적을 달성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인체가 영계에 가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영인체를 완성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육신에서 영인체로 가는 요소가 생력요소인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원리와 말씀을 육신을 통해서 생활화한 인격의 요소가 생령요소입니다.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이 오더라도 죽는 순간까지는 육신을 통해서 영인체를 성장·완성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생활이 중요합니다. 영인체를 완성시킨다는 말은 사랑의 완숙, 심정의 완숙을 말합니다. 완숙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고 느끼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 완성의 최종 목적은 4대심정권의 완성입니다. 4대심정권의 완성은 절대성 위에서 세워집니다. 아무리 심정 완성의 길을 가더라도 절대성을 지키지 않고 타락해 버리면 그 순간에 끝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어지고 자기 속에서 생소가 솟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다.

 

(1) 육신생활의 중요성        

 육신을 지니고 영인체의 성장을 완성해야 합니다. 완성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육신이 있어야 영인체가 생기고 영인체가 성장하고 완성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지상생활을 통해서 4대심정권을 완성해야 합니다. 참사랑을 체휼하고 참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지상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상에 살면서 죄를 지었다면 반드시 지상에서 속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속죄할 때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죄가 청산되는데, 영계에서는 탕감법(蕩減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만 속죄할 수 있습니다.

 

육신 쓰고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를 다 벗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영계에서 죄를 벗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재림해서 육신을 지닌 인간을 통해서 그 죄의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200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영계에서 그 정도로 고통을 당하기 전에 지상에서 단 1분이라도 소중히 여기면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생활은 영인체를 탄생시키고 영인체를 번식시킵니다. 육신이 없으면 영인체의 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인체에 지극히 필요한 것이 육신입니다. 영인체를 성장시켜야 할 육신인데도 불구하고 육신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생활 자체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지상생활은 영계를 결정합니다. 지상생활을 어떻게 했느냐가 영계생활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회개하고 가겠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열매가 상처를 입고 쭉정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절대 잘못되지 않게 살고 영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선한 생활을 하면 영인체의 선화(善化)가 이루어져 천국에 가고, 악한 생활을 하면 영인체의 악화(惡化)가 이루어져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 주관권(主管圈)으로 가고, 악한 사람은 사탄 주관권으로 가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리대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영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원리대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의 본심에 따라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합니다. 영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터전이 본심입니다. 본심은 성상적인 분야의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본심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극히 독자적이고 지극히 중심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속성입니다.

 

양심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고, 부모보다도 앞서 있고, 스승보다도 앞서 있습니다. 부모는 나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속에 있는 양심은 밤이나 낮이나 자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나와 함께할 수 없지만,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양심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하면서 내 안에서 참스승의 노릇을 합니다. 나를 언제나 올바르게 기르는 부모는 나와 영원히 함께할 수 없지만 양심은 부모보다 더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를 지도하면서 선한 영인체를 만들도록 노력합니다.

 

영인체는 지상에 살면서 만드는 인간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어떤 작가가 자기의 일생을 투입해서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고 죽었다면, 그 작품은 그 사람의 일생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귀한 영인체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가야 합니다. 어떤 작품보다도 영인체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생명력을 지닌 작가로서 이 세상에서 영인체라는 작품 하나를 완성시켜 놓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육신을 중심하고 영인체가 번식하고 탄생합니다. 그래서 지상생활은 영계를 결정합니다. 누가 지옥이나 천국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생활 그 자체가 영계를 결정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내가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내가 예수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참되게 살아야 하고,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영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영인체의 중요성              

 영인체는 영계의 주인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영인체가 영계에 가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계는 사랑의 세계이고 심정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영인체가 사랑을 완성하고 심정을 완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영인체는 육신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교(靈交)합니다. 영교는 영적인 교제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영교는 영인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영교는 영인체 속에 있는 생심이 심정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영인체는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원하듯이 영인체도 영생합니다.

영인체는 육신과 모양이 동일합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인체는 육신을 통해서 생기고 육신을 통해서 성장 완성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인체는 아름다워지기도 하고 추한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면서 산 사람은 영인체가 흉측하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몸은 똑같은 사람인데 얼굴 자체가 아주 흉측한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지상에서 볼 때는 형편없는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못생겼다고 손가락질 받은 사람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영인체가 완성되면 영계에서는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거룩하게 보입니다.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영인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인체 속에는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일생이 자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것까지 기록됩니다. 생각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것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기록됩니다.

 

과거에는 각종 경기에서 선수들이 조그마한 오차를 놓고 심판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녹화 기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가 동원되어 입체적으로 촬영합니다. 한 방향이 아니라 전후·우좌·상하에서 촬영합니다. 그것을 분석하면 금방 판정이 납니다. 느린 동작으로 보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경기에 영향을 주는 말을 했다면 그것까지 기록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생각한 것도 영인체에 기록됩니다.

 

(3) 천국과 지옥의 결정       

 영계에 가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다 왔는지를 금방 압니다. 그러니까 누가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행한 대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남을 위해서 산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타아적 자각(他我的自覺)’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의 체험을 남을 위한 실천력으로 만드는 것이 타아적 자각입니다. 그것이 곧 이타(利他)요, 위타(爲他)입니다.

 

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남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자아적 자각(自我的自覺)’이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은 것을 자기를 위해서 결실을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기(利己)요, 위기(爲己)로서 사탄의 요소입니다.

 

천사장은 아담과 해와가 완성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아담·해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이 부모라는 것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장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 행세를 했습니다. 그것이 천사장의 타락입니다. 그때부터 천사장은 사탄이 되었습니다.

 

타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 동안 그런 요소가 작용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타락도 자아적 자각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타적이 되어야지 이기적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언제나 타아적 자각이 필요합니다.

 

본연의 인간은 마음속에 타아적 자각을 지니고, 타락한 인간은 마음속에 자아적 자각을 지닙니다. 본연의 인간과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과 행동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한 점에서 목적과 동기가 달라지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것은 자신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4) 생심과 육심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은 육신의 마음인 육심을 통해서 완성하는데 생심의 완성은 곧 영인체의 완성입니다.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같습니다. 성상은 주체고 형상은 대상입니다.

 

인간의 마음            

하나님을 중심해서 생심과 육심이 성상과 형상의 관계로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주고받으면 마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은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으로 합성일체화한 하나의 작용체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심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창조목적을 놓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심과 육심이 상대기준을 조성해서 수수작용을 하면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되는데 그 마음을 본심이라고 합니다. 본심은 육심이나 생심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할 때 본심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심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생심과 육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심의 성장과 완성은 생심과 영체, 그리고 육심과 육체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육심은 육신이 살아있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생심은 본심과 함께 영원히 영인체 속에 남습니다. 육신이 노쇠하여 흙으로 가게 될 때 육심도 같이 없어지지만 생심은 본심과 함께 영원히 영인체 속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중심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한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으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한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하면 합성일체화한 작용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 작용체가 바로 마음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해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본심이고, 진리를 중심해서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해서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양심입니다.

 

인간은 선하게 살고자 하는 본심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해서 절대 진리의 기준은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중심하고 양심기준도 달라집니다. 이념과 사상이 다르면 양심의 지향성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믿고 있는 진리라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도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일체 된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을 원리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래서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리는 근본입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진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통해 진리의 내용을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그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거짓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짓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양심을 통해서 나타난 진리관도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본심과 양심의 관계                

본심과 양심은 성상과 형상의 관계입니다. 본심은 안과 같고 양심은 밖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상대기준을 조성한 본심과 양심의 수수작용으로 본연의 마음이 이루어집니다.

본심과 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지향하고 그 뜻을 따르게 합니다. 본심과 양심은 하나님의 뜻과 방향을 달리한 사심(邪心)에 반발하고 선을 지향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타락인간의 생심과 사심

타락인간의 생심과 육심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생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로 사탄의 영향권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생심은 육심을 대해서 주체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육심의 주관을 받습니다. 성숙하지 못해서 육심의 주관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미숙한 생심이 사탄의 주관권에 있는 육심과 수수작용하여 합성일체화한 마음을 사심이라고 합니다. 생심이 성숙해야 되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완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성숙상태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육심과 일체가 되면 그 영향으로 육심이 더 성숙하기 때문에 육심이 주체가 되고, 생심은 그 육심의 주관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의 생심과 육심이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한 마음이 사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리적인 모습을 흉내내서 먼저 이루어 놓는 것이 사탄의 세계입니다.

 

참고

 

1) 영계에서의 3단계 심판             

 영계에 가면 3단계 심판을 받습니다. 원래는 열두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도 최소한 세 과정의 심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인격심판(人格審判)이고, 두 번째가 공로심판(功勞審判)이며, 세 번째가 공금심판(公金審判)입니다.

 

그것이 지상생활에 대한 3대 심판입니다. 인격심판을 통과하려면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참사랑은 부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참사랑을 지상에서 완성해서 영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로심판을 통과하려면 공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인간은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공금심판을 통과하려면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2) 인간이 지켜야 할 3대 철칙          

 참아버님이 2006년 6월 13일, 천정궁 입궁 대관식 때 천일국 백성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인간이 지켜야 할 3대 철칙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혈통 보존, 둘째가 인권 유린 금지, 셋째가 공금 약취 금지입니다.

 

혈통 보존은 순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혈통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인사 조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면을 볼 때는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그 배후에는 그 사람이 그 자리로 갈 때까지 조상들의 수많은 피 흘린 공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자기가 걸립니다. 그래서 남의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금을 약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금은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됩니다. 이런 내용들이 우리가 지상에서 육신을 지니고 살면서 지키고 책임져야 할 과제들입니다.

 

3) 주의할 것          

 원리 말씀은 내 영인체의 양식입니다.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내 영원한 영인체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입니다. 말씀과 원리 속에는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리를 듣고 잊어버리면 마음속에는 사탄의 생각과 사탄의 말만 남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용서받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출발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기도는 내 영인체를 살리는 공기와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공기가 없어서 죽은 자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면 사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언제나 불평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불평불만은 영인체에게 독약이 됩니다. 가다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져도 불평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가르쳐 줍니다.

심판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말씀심판입니다. 말씀을 불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느냐 하는 말씀심판이 있습니다. 둘째가 그 말씀을 실천했느냐 하는 인격심판이 있고, 셋째가 그 말씀대로 사랑했느냐 하는 심정심판이 있습니다. 말씀심판·인격심판·심정심판은 자기가 하는 자기 심판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인간을 사랑했느냐, 만물을 사랑했느냐, 원수까지 사랑했느냐,’하는 사랑의 심판, 즉 심정의 심판이 있습니다.

‘원리본체론’의 결론은 ‘위하여 살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위해서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도 위하여 살아야 하고 만물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