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14

2013. 1. 6. 20:52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5)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는 모두가 어떤 가치 평가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미다.’하고 ‘사랑’과 ‘미’를 따로 구분해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도 ‘미’가 있고, ‘미’ 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경우는 ‘사랑과 미’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과 미’가 동질성을 지닌 것과 달리 ‘선과 악’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선과 악을 다루는 것은 타락세계의 인간들이 악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선으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정확히 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가치 평가입니다.

 

‘의와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의로운 것이고 어떤 것이 불의한 것인지,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불의의 인간인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사람이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 말이 옳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를 놓고 볼 때 그런 평가 기준은 모두 정리되어야 합니다.

 

(1) 사랑과 미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이성(二性)의 실체가 성상과 형상, 또는 양성과 음성입니다. 그것이 각각 주체와 대상이 됩니다. 그 주체와 대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하나님의 제3대상(第三對象)이 나타나는데, 그때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이루어집니다. 3대상(三對象)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위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위기대를 이루기 전에 하나님의 제3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을 사랑이라고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동적(動的)이고, 미의 자극은 정적(靜的입니다. 남자가 주체이고 여자가 대상일 경우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사랑은 동적입니다. 그때 여자가 나타내는 반응은 미가 되는데 그 반응은 정적입니다. 남자의 사랑 표현은 적극적인 반면에 여자의 사랑 표현은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도 미가 있고, 미 속에도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쪽만 고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랑과 미는 수수작용을 하기 위한 요소로서 두 요소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한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자녀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 세 가지 사랑을 3대(三大) 사랑이라고 표현하지만, 자녀의 사랑에는 형제의 사랑이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4대(四大)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형제의 사랑·자녀의 사랑, 이렇게 4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뿌리가 바로 심정입니다. 4대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에서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체 속에 4대심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사랑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4대심정권의 본체로 성장해 왔고, 그 심정을 실감하기 위해서 직접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아담·해와가 완성한다는 말은 곧 4대심정권의 완성을 뜻합니다. 아담·해와가 4대심정권을 완성하면 하나님도 완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4대심정권을 이루기 위한 것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고, 그 말씀은 절대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성의 사랑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부부의 사랑·자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기대가 사위기대, 곧 가정입니다. 가정의 구성원은 부모·부부·자녀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여섯 사람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맨 처음 자녀는 부모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 자녀가 부부의 자리를 거쳐 자녀를 낳으면 맨 처음의 부모는 할아버지·할머니도 없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자리를 거쳐서 부모가 되는 것이지, 부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부모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자리를 거쳐서 부부가 되는 것이지, 자녀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서는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가 있어야 자녀가 있고, 자녀가 있어야 부모도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미(美)로 귀결되는 수수작용의 관계입니다. 수수작용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완성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창조이상의 완성을 위해서는 수수작용이 필수 요건입니다.

 

수수작용의 결과,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미’가 나타나는데, 미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충(忠)', '효(孝)’, ‘열(烈)’이 그것입니다. 이미 밝힌 대로 ‘충’은 마음에 중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바로 부모입니다.

 

나는 부모에서 출발했습니다.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고, 부모에 의해서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느끼고 배웁니다. 거기서부터 사회·국가·세계로 더 높은 차원을 향해 심정의 생활환경을 넗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인데, 그 부모의 뿌리는 심정의 본체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충(忠)입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라는 신념으로 사는 것이 충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비록 두 분이지만, 그 부모에서 부모로 올라가면 결국 인류는 최초의 조상인 한 남자, 한 여자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조상은 뿌리가 하나입니다. 최초의 조상은 내 육신의 뿌리가 되지만, 하나님은 내 영원한 영인체의 뿌리가 되는 분입니다. 만민 공통의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의 중심이 부모인데, 그 부모의 근원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충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충이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라면, ‘효(孝)’는 나를 낳아준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듯이 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부모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효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복음 14장 10절)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모의 중심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충’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고, ‘효’는 부모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烈)’은 상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충과 효는 종적인 관계이고, 열은 횡적인 관계입니다. 열은 상대적 개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열남·열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자녀로서 종적인 관계이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횡적인 관계입니다. 상대적인 관계로서 ‘열’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횡적으로 볼 때 절대성의 본체인 아버지 앞에 실체적인 절대성 중심한 생식기의 주인은 상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상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부인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면 열남(烈男)이 되고, 여자의 경우 남편을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했을 때 열녀(烈女)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열남·열녀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성을 중심해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실체로 나타난 상대권에 있는 남자나 여자는 절대성을 중심한 열남·열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는 충신(忠臣)은 있지만 충녀(忠女)는 없습니다. 여자가 하나님을 중심한 나라의 이상을 갖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효와 열’도 마찬가지입니다. 효자·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으면 열남은 없습니다.

 

본연의 세계에서는 충·효·열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충신이 있듯이 충녀도 있어야 하고, 효자·효녀가 있고, 열녀가 있듯이 열남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절대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절대성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충’도 없어지고, ‘효’도 없어지고, ‘열’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해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은 서로 주고받는데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려주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 안에도 ‘미’가 들어 있고, ‘미’안에도 사랑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미는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의 사랑이 없으면 대상에게서도 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상이 지닌 ‘미’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의 가치는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개별상(個別相)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놓고 ‘마음에 안 든다, 밉다, 싫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밉고 싫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미의 가치는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이 충·효·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선과 악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조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삼대상이 되지 않으면 사위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대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속에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하면 하나님의 삼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삼대상이 서로 수수작용하면 사위기대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善)이라고 합니다.

 

반면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사탄의 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하면 선이 되고, 사탄을 중심하면 악이 된다, 그 말입니다.

앞으로 타락론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는 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악이 생겨났습니다. 악의 주체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시종(侍從)인 동시에 인간의 종이었습니다. 그 종이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켜 자기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존재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사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원리가 무시된 것입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선과 악의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선이 있으니까 악이 있고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다.’는 상대개념(相對槪念)이 아니라 상반적 개념(相反的槪念)이 아니라 상반적 개념(相反的槪念)입니다. 선과 악은 한 점에서 출발했지만, 둘은 동기와 목적이 다르고 방향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만나면 갈등하고 투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3) 의와 불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義)라고 하며, 악의 목적, 다시 말하면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不義)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을 위한 생활은 의가 되고, 악을 위한 생활은 악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로운 자리에 있느냐, 의롭지 못한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도 역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고 있지 않느냐?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선의 목적과 방향을 따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의와 불의는 어떤 학문적 단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활적으로 표현되는 실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심이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동기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일체가 됩니다.

생활을 통해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이 구분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