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13

2013. 1. 6. 20:53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6. 창조본연의 가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목적은 반드시 가치를 동반합니다. 목적이 실현되는 것은 가치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것과 같습니다. 목적을 하나의 꽃이라고 한다면, 가치는 그 꽃 속에서 풍기는 향기나 그 꽃의 열매와 같습니다.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가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는 창조목적을 성취했을 때에만 실현되는 것입니다.

 

        1) 가치의 정의    

가치는 절대 혼자 결정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으로 결정됩니다. 목적 자체도 혼자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인 자리에서 목적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의 본체요 주체이지만, 하나님 혼자서는 창조이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혼자서는 당신이 지니신 거룩한 가치를 드러낼 수 없고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반드시 대상인 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위해서 전체를 투입하고 또 투입하셨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실현되어야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절대로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치가 결정되려면 주체가 욕구(慾求)하는 것을 대상이 충족(充足)해 주어야 합니다. 대상은 자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내용과 성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계에서는 창조본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한 분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하나님의 대상이기 때문에 주체인 하나님이 어떤 이상을 추구하면 그 대상인 인간도 같은 이상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지니신 목적이 있다면 대상인 인간도 같은 목적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은 주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가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결정되는데, 그것은 주체가 욕구하고 대상이 충족시켜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가치의 결정     

가치의 결정은 여러 측면에서 정의(定義)할 수 있지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적관으로 본 가치 결정입니다.

 

(1) 목적관으로 본 가치 결정

예들 들어 한 자루의 칼이 있습니다. 그 칼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집니다. 만일 강도가 칼을 들었다면 살인하는 칼이 되고, 의사가 칼을 들었다면 환자를 수술해서 생명을 구하는 칼이 됩니다. 한 자루의 칼이지만 그 칼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한 종이가 있더라도 휴지로 쓰면 그것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낡고 너덜너덜한 새카만 종이라도 가문의 귀중한 문서를 작성한 종이라면 그 종이는 고이 간직됩니다. 종이가 깨끗하다,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종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그 종이 한 장의 가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집도 있고, 흙으로 지은 토담집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대리석으로 지은 집이 토담집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집을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국가를 망치기 위해서 역적들이 모이는 장소로 대리석 집이 쓰인다면 외견상으로는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국가적인 목적으로 볼 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조국이 바로 서려면 그 집을 헐어야 합니다.

 

토담집이라도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독립투사들이 생명을 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여서 회의하는 장소라면 그 집은 지극히 귀하고 가치 있는 집입니다. 그런 집은 보존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가 동기가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참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적관이 중요합니다. 목적관은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와 대상이 그 목적을 결정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체에는 주체적인 마음과 대상적인 몸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과 몸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왔지만, 사실 나의 마음과 몸은 본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부모이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나왔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 또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계속 가면 부모의 뿌리는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인류는 아무리 많이 번식하더라도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에서 빨아올린 영양분은 가지를 수없이 많은 잎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수없이 번창하고 영계까지 영인들이 가득 차 있어도 그 뿌리는 단 한 분인 하나님입니다. 내가 한 분의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내 마음과 몸도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그 부모를 중심한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이자 천주의 축소체입니다. 가정의 기본은 부모·부부·자녀 여섯 명입니다.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한 분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해서 참사랑으로 얽혀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확대한 것이 국가요, 세계입니다. 사람은 가정이 확대된 세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는 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은 가정이 확대된 세계의 인류를 사랑할 수 없고, 영계에서도 다른 영인들을 사랑하면서 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가면 즉시 걸립니다. 사랑의 세계는 어디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구성원은 서로 참사랑에 감응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누구든지 좋아하기 때문에 참사랑이 있는 곳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부모이듯이 내 마음의 중심도 부모여야 합니다. 내가 부모 안에서 생겼고 부모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중심은 부모입니다. 심정과 사랑과 인격도 부모로부터 온 것입니다.

 

가정을 확대한 것이 국가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을 충신(忠臣)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임금만을 위해 산 사람을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만 임금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은 국가의 중심이고 그 나라의 주권자입니다. 임금은 가정으로 볼 때 부모와 같고 백성은 자녀와 같습니다. 나라의 주권자는 백성을 자기 자식같이 사랑하고 돌봐야 합니다.

 

부모라면 자식이 배고플 때 돈을 빌려서라도 먹이고 돌보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자라면 백성이 추워서 떨고 있을 때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혀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 굶기고 따뜻한 옷을 입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부모가 자식들을 돌보듯 그 백성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백성은 그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충성은 가정의 효도와 같습니다. 효의 도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에서 충신이 되지 못합니다.

 

국가가 확대된 것이 세계입니다. 가정에서 효도하고 국가에서 충성을 다하듯이 세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자(聖子)가 있습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혈통을 잇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성인은 있었지만, 성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핏줄을 가진 아들딸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성자는 하늘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치리하는 궁(宮)에서 지켜야 하는 궁법(宮法)이 있고, 일반적인 법이 있습니다. 지상에도 하늘나라(天國)이 있고, 하늘나라의 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과 천상에서 하늘나라의 법을 지킬 줄 알고, 그 두 세계에 있는 궁의 법을 따르고 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자입니다.

 

가치는 목적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중심은 효(孝)입니다. 효의 근본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인데,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피와 살과 뼈를 만들어주신 나의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주시고 영원성까지 주신 나의 부모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실체가 되어 우리 앞에 부모로 현현하신 분이 참부모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경배하고 기도하고,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부모님의 용안을 보고 ‘내가 오늘 부모님 말씀대로 이렇게 살겠다.’고 하는 굳은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자녀들도 나가고 들어오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정제단(家庭祭壇)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치의 결정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2) 창조본연이 가치 결정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해서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그 대상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것이 창조본연의 가치입니다.

 

주체가 추구하는 욕구가 있으면 그 욕구를 대상이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주체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대상의 존재 목적입니다. 주체가 이상을 이루기 위한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욕구를 충족해 주는 것이 대상의 존재 목적입니다. 주체의 입장에서 창조이상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욕구를 대상의 자리에서 충족해 드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체의 욕구가 충족될 때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어떤 대상의 존재하는 목적과 인간 주체의 가치 추구욕(追求欲)이 상대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창조본연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하여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려면, 먼저 하나님을 중심으로 욕구를 지닌 인간 주체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합성체, 이렇게 3대상(三對象)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3대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3대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곧 창조목적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한 인간 주체가 대상과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제3대상이 이뤄지게 되는데, 그것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가 됩니다. 창조본연의 사위기대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창조본연의 가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창조본연의 가치기준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므로 그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대상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이라면 거기에서 나타난 대상도 절대가치의 주체 앞에 대상의 자리에 서게 되므로 비록 대상이지만 가치로 볼 때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창조본연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합니다. 절대라는 말은 유일하기 때문에 쓸 수 있습니다. 유일하지 않은 것은 절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변하기 때문에 절대가 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절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는 영원하기 때문에 절대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말 자체가 유일하고 불변하고 영원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고 절대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는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합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한 번 먹은 마음을 3일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뜻의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변하고, 영원성을 갖지 못하고, 유일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박사 지식인도 마찬가지이고 양심을 지키고 사는 선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평가할 때 할 쪽에서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충신으로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역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에 정몽주라는 충신이 있었습니다. 정몽주는 고려에서는 충신이지만, 조선에서는 역적입니다. 해전사(海戰史)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은 한국에서는 충신이지만, 일본에서 볼 때는 원수입니다. 히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에서는 충신이지만, 한국에서 볼 때는 원수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 한쪽에서는 충신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역적으로 보는 것은 평가하는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은 변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절대·유일·불변·영원성을 가지는 하나님만이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므로 하나님의 실체로 오시는 참부모님만이 실체세계에서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현실세계는 어느 누구도 옳다,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부모님에 의해서 ‘이 세계는 잘못된 세계다, 이 국가는 이렇게 가면 안된다. 오늘날 세계는 이렇게 가면 안 된다.’라고 정리하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의 자리에 선 절대자이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실체로 오신 참부모님만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창조본연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4) 창조본연의 지정의와 진미선             

인간의 마음은 지(知)·정(情)·의(意)의 세 가지 기능을 발휘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그 마음 곧 지·정·의의 감응체(感應體)로서 진(眞)·미(美)·선(善)의 가치를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정·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 실현욕(實現欲)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정·의에 감응하고 그것이 몸에서 행동을 통해 창조본연의 진·미·선의 가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지’가 먼저냐? ‘정’이 먼저냐? 를 놓고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본체에는 ‘지’와 ‘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 안에도 ‘정’과 ‘의’가 있으며 그 중심이 ‘지’입니다. ‘정’ 안에도 ‘지’와 ‘의’가 들어 있으며 그 중심이 ‘정’입니다. ‘의’ 안에도 ‘지’와 ‘정’이 들어 있는데 그 중심이 ‘의’입니다.

 

이처럼 구분해서 설명하지만 하나님 본체 안에는 ‘지·정·의’가 통일체로서 모두 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지·정·의’에 감응되어 인간의 마음에 ‘지·정·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지적’인 요소가 중심이지만, 그 가운데는 ‘정적’인 요소도 있고 ‘의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이 많고, 어떤 사람은 ‘지적’이라서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적’이라서 행동하기를 좋아하지만, ‘정적’인 면에서는 나약한 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중심 요소가 강하냐에 따라서 지적인 사람, 정적인 사람, 의적인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그런 마음이 몸을 통해서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 가치가 ‘진·미·선’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지’는 참(=眞)을 추구하고, ‘정’은 미(美)를 추구하고, ‘의’는 선(善)을 추구하는데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심정을 뿌리로 한 ‘지적’인 분야는 참을 추구하되 심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지’는 그 자체가 거짓된 이론이 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 이론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혁명을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심정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권에서 일체가 되지 않는 인간은 거짓된 인간이고, 거짓된 인간이 세운 이론은 거짓된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심정이어야 하고, 모든 창작의 동기도 심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정·의’가 사랑에 의해서 감응되어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데 우리 마음에 ‘지·정·의’가 사랑을 통해서 감응되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진·미·선’입니다. 그래서 ‘진·미·선’에 대한 가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