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10

2013. 1. 6. 20:57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3) 정분합작용에 의한 삼대상목적 및 사위기대

 원리본체 속에 중화적 통일체로 존재하는 본양성과 본음성이 만유원력에 의해 수수작용을 하면, 양성과 음성으로 분립되어 남자와 여자라는 상대적 실체가 나오는데, 그 상대적 실체가 다시 수수작용을 하면 하나의 새로운 실체로 아들 또는 딸이 나옵니다. 다시 합성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전개, 즉 창조의 과정과 피조세계의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세계의 발전은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을 비롯하여 정분합작용과 삼대상목적, 그리고 사위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1) 정분합작용

 하나님을 정(正)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分立)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만유원력에 의해서 당신 자체 속에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하면 양성과 음성의 분립이 일어납니다. 양성을 지닌 남자와 음성을 지닌 여자로 분립되는 것입니다.

분립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유원력에 의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하듯이 그들도 만유원력에 의해서 상대기준을 조성해 수수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합성체인 자녀가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분립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합성체인 자녀, 이렇게 발전된 3단계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3단계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을 정분합(正分合)이라고 하고, 그 작용을 정분합작용이라고 합니다. 이 원리가 하나님이 원래 세운 창조의 설계도입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이 정분합과 정반대되는 이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타락으로 인해 생긴 이론으로, 사탄이 세운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 세계에서 발전법칙으로 사용하는 정반합(正反合)이라는 이론입니다. 정반합은 공산주의 발전법칙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내용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주의 근본을 물질로 봤습니다. 영계도 부정해 버리고 신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반합은 변증법(辨證法)의 논리 전개에서 나온 말입니다.

 

변증법의 기본 전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속적인 반복, 끊임없는 모순의 생성과 지양을 통해 변화·발전한다는 논리입니다. 헤겔이 주장했던 정반합에 의해서 변화·발전한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정반합이론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이론을 취하게 되면 혁명적인 인간이 됩니다.

 

물론 정반합이 나오기까지 그 배후에 산업혁명 초기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부작용을 급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정반합이라는 이론은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성성상으로 계시듯이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에 전부 이성성상으로 나타납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물 속에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물 속에는 두 요소가 어느 기간 동안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가 일정 시기가 지나면 그 자체 속에서 두 요소가 대립·투쟁해서 정(正)도 아니고 반(反)도 아닌 새로운 합(合)이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달걀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달걀을 보면 달걀껍질이 있고 껍질 안에 노른자와 흰자가 있습니다. 노른자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요소인 씨눈(胚子)이 있습니다. 씨눈은 조그마한 점과 같습니다. 그것이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요소입니다.

 

그들은 달걀을 정반합에 대입해 설명하는데, 달걀껍질은 자본가로, 달걀노른자에 있는 씨눈은 노동자·농민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달걀껍질 속에 있는 씨눈을 억압된 존재로 봤습니다. 달걀껍질이 씨눈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껍질이 아니고 씨눈인데, 씨눈이 일정 기간 동안은 조화와 통일을 이룬다고 보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씨눈은 싸울 힘도 없고, 껍질과 싸우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씨눈이 노른자와 흰자를 전부 영양분으로 섭취해서 병아리가 되면 껍질과 대립 투쟁한다는 것입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면 달걀 껍질이 아니고 씨눈도 아닌 새로운 생명체인 병아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혁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오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 자체를 혁명하기 위한 동기로서 세웠습니다.

 

그러나 달걀껍질과 달걀의 씨눈은 싸우기 위한  두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합목적성(合目的性)이라고 합니다. 달걀껍질은 씨눈이 병아리가 될 수 있도록 보호할 책임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껍질 속에 있는 씨눈은 껍질에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될 때까지 껍질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껍질은 씨눈이 병아리가 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하고, 씨눈은 병아리가 될 때까지 껍질의 보호를 절대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은 상호 협력하는 합목적성을 띠고 있습니다. 21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만일 그 순간에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생명체가 죽기 때문에 달걀 끝에 얇은 공기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체가 대립·투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그 안에다 해둔 것입니다. 그것이 달걀이 병아리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병아리의 부화 과정을 자본가와 노동자에 대입하려고 했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자본가를 달걀껍질에 비유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은 숫자는 많고 생명체를 가졌지만 힘이 없다고 봤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정 기간 동안 조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연합하고 연대하고 단합해 자본가와 대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가는 숫자가 적은데 노동자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자본가의 배후에 국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본가를 타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노동자·농민들이 아무리 감옥에 가고 죽어가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혁명하다가 죽어가면서도 목적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는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그 철학이 유물론(唯物論)이고, 그 자체의 발전단계가 변증법이며, 그것을 역사에 대입한 것이 유물사관(唯物史觀)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자본론(資本論)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출현한 당시에는 그 이론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5, 60년 전만 해도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보다 강력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는 공산주의와 같은 체계적인 이론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나 젊은 청년들이 한때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그동안 세상을 어렵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 실현을 방해한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원리본체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것입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의 철학자·경제학자)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철학자)과 협력하지만 나중에 하나님도 부정하고 종교도 부정했습니다. 당시 산업혁명 초기에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까지도 14시간 정도 중노동을 해야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이 그렇게 노동자들을 혹사시켰습니다.

 

그것을 보고 마르크스는 분개했습니다. 자본가들을 움직이고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주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주어야 하는 사람이 당시 관념론 철학자들이고 종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문제를 해결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본가와 결탁했습니다.

 

당시의 종교관은 예정론이 중심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죽게 되어 있고, 자본가들은 자본가로서 예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준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결국 종교를 부정하고 신을 부정해 버리고 영계까지 부정해 버렸습니다.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신앙하던 그가 신을 부정하게 된 이유는 그런 사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변증법은 대립·투쟁을 내세우는데 대립·투쟁은 증오와 미움에 의해서 나옵니다. 증오와 미움이 있지 않고서는 대립·투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인간이 타락해서 생긴 이론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또는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라고 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하의 유물관과 헤겔의 변증법을 조합해 만든 이론입니다. 그 이론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세운 것이 ‘통일원리’의 정분합이론입니다.

 

정분합이론은 주고받는 수수작용의 수수법(授受法)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공산주의는 미움과 증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중심이지만, ‘통일원리’는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수수법적 유일론(授受法的唯一論)이 중심입니다.

 

우주의 본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에는 두 요소가 있지만 그것은 싸우기 위한 요소가 아니라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일체로 계십니다. 모든 존재는 수수작용에 의해서 발전하는데 발전단계는 정분합(正分合)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정분합에서는 모두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분합작용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신상과 신성으로 계시고, 당신 속에 있는 모든 요소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성을 맺기 위한 것이 수수작용이고, 수수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작용이 정분합작용입니다. 수수작용을 하는 것은 정분합에 의해서 결국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곧 사위기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2) 삼대상목적             

 하나님·남자·여자·자녀 네 존재가 각각 주체 위치에 설 때,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의 위치에 섭니다. 네 존재 가운데 한 존재가 주체가 되면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삼대상(三對象)이라고 합니다.

 

두 존재가 관계를 맺을 때 상대기준을 조성한다고 말합니다. 상대기준은 둘이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둘이 있더라도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이 관계성을 맺는 것과 같이 세 존재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관계성을 맺는 것이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입니다.

 

삼대상기준을 세우고 네 존재가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이 완성됩니다. 가정을 놓고 보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주체)와 여자(대상)가 있고 그 자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면 나머지는 제1대상(남자), 제2대상(여자), 제3대상(자녀)입니다.

 

그 다음에 남자가 주체가 되면 제1대상이 하나님이고, 제2대상이 여자, 제3대상이 자녀가 됩니다. 여자가 주체가 된다면 제1대상이 하나님, 제2대상이 남자, 제3대상이 자녀가 됩니다. 자녀(합성체)가 주체가 된다면 제1대상이 하나님이고, 제2대상이 아버지, 제3대상이 어머니가 됩니다. 네 존재(四者)가 각각 주체의 위치에 설 때에 나머지 세 존재(三者)는 삼대상(三對象)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네 존재가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이 완성됩니다. 번식으로 하나가 분립되더라도 네 존재가 서로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이때 관계성을 맺는 이유는 수수작용을 통해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한 분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원리의 본체를 닮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두 요소가 있지만 당신 스스로도 수수작용을 해서 분립합니다. 나온 네 존재는 반드시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아담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해와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자녀의 목적도 하나님 안에서 나옵니다. 존재하는 위치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모두가 한 분의 하나님에 의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네 존재가 삼대상기준을 조성해서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목적이 하나니까 한 점에서 출발해 동기(動機)도 같고, 방향도 같습니다.

 

그런데 동기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면 목적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목적이 다르다는 말은 동기도 다르고 방향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네 존재의 중심은 반드시 하나님입니다. 모든 존재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동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동기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녀도 아닙니다.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동기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기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직에서 위치가 높아질수록 자기가 주인노릇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가 소속한 단체는 어려워지고, 그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동일해야 합니다. 그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동기가 되게 하고, 언제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활동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느냐가 우리가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할 과제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망각하는 데서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이 나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동기여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오신 메시아는 당신 고집만으로 사시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오셔서 이루려고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 얘기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는 동서남북으로 열어 놓되 그 내용이 뜻을 이루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냐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반대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같이 협력해야 합니다.

 

(3) 사위기대        

 정분합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 네 존재의 근본기대를 사위기대(四位基臺)라고 합니다. 네 존재가 삼대상기준을 조성한 터전에서 수수작용하여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집니다. 수수작용을 하면 삼대상 자체가 모두 합목적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삼대상목적이 완성되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주체가 수수작용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대상이 수수작용을 합니다. 또 하나님에서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 태어난 아들딸들도 주체인 아버지와 주고받고, 대상인 어머니와 주고받습니다. 그러므로 종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의의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완성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이 비로소 이 땅 위에 실현되는 기대입니다.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위기대는 곧 존재기대(存在基臺)이기도 합니다. 사위기대는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세워지면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밤중에 깊은 산골이나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나 허허벌판과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나침반만 있으면 동서남북 방향을 잡게 되고 내 위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동서남북이라는 사위기대 속에서 존재위치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입장에 있느냐, 주체의 입장에 있느냐, 대상의 입장에 있느냐, 아니면 합성체의 입장에 있느냐?’를 알고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존재기대가 확실해야 합니다.

 

사위기대는 사랑의 근본기대(根本基臺)입니다. 사랑의 본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존재가 탄생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사랑에서 생겼고 사랑에 의해서 나왔는데, 사랑의 본체가 부모입니다.

 

사랑의 근본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소생적(蘇生的)인 사랑입니다. 분립된 아담과 해와는 아버지의 사랑을 실체처럼 느끼고 체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대상이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의 사랑은 장성적(長成的)인 사랑에 해당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아들딸을 낳으면 그 자녀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는 손자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1대라고 한다면 아담과 해와가 2대가 되고, 그 자녀가 3대가 됩니다. 3대인 손자손녀의 사랑은 완성적(完成的) 사랑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생적 사랑, 부부의 사랑은 장성적 사랑, 자녀의 사랑은 완성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랑의 근본기대가 형성됩니다.

아담·해와가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녀인 2대는 가졌지만 손자인 3대를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기대도 세울 수가 없었고, 따라서 창조목적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사위기대는 선(善)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입니다. 선의 뜻은 하나님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립된 아담과 해와를 통해서, 또 아담과 해와가 낳은 아들딸을 통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한 뜻의 실체이고 해와도 선한 뜻의 실체입니다. 그 둘이 선의 실체이기 때문에 수수작용을 통해 태어난 자녀도 선의 실체가 됩니다. 실체인 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선의 대상이 됩니다. 사위기대는 선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 선한 뜻을 이루는 자리이기 때문에 선의 근본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선의 근본기대는 본래 아담과 해와가 세워야 하는 자리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인간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담은 장자 중의 장자요, 해와는 장녀 중의 장녀입니다. 그 둘이 완성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그로부터 태어난 아들딸들은 아담·해와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나를 낳아준 부모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내가 내 부모를 잘 섬기고 모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 부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낳아서 기르지만 그 부모도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이 중심입니다. 내가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 부모를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는 힘의 근본기대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대를 세워서 힘이 작용하는데, 그것을 사위기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힘의 본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힘 자체도 사위기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위기대를 세워 역사해야 모든 힘이 발동하고, 선의 실체로 사랑과 존재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 실체적으로 찾으려고 한 대상이 후(後)해와입니다. 후해와를 찾기 위해서 기대를 세운 것이 요셉가정과 사가랴 가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후해와를 찾지 못했습니다. 능력의 기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위기대는 또 3단계의 근본기대입니다. 정분합은 소생·장성·완성 3단계 발전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발전단계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분립하고 주고받으면 합성체가 됩니다. 그래서 사위기대는 3단계의 근본기대임과 동시에 정분합이 나오는 발전단계입니다.

 

그 다음에 사위기대는 4수(四數)·3수(三數)·12수(十二數)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4수가 제일 좋은 수입니다. 4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4수를 사탄이 취해 갔습니다.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와야 합니다. 4수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자 존재기대이고, 사랑의 근본기대요, 선의 근본기대요, 힘의 근본기대요, 3단계의 근본기대입니다. 그러니까 4수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3수(三數)도 하나님 안에 있는 숫자입니다. 오늘날 기독론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신(三位神)을 거론합니다. 그러나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 본체와 그 본체에서 분립된 아담과 해와를 일체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담·해와를 삼위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엄연한 개체이지만 뜻으로 볼 때는 삼위일체가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위기대는 3수의 근본단계입니다. 사위기대가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3수는 12수의 근본기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될 때 그 대상은 아담·해와, 그 자녀 이렇게 셋입니다. 아담이 주체가 될 때는 하나님이 제1대상, 해와가 제2대상, 그 자녀가 제3대상입니다. 네 존재 중에서 한 존재가 주체에 위치했을 때 나머지 세 존재는 대상이 됩니다. 네 존재가 마주하는 3대상을 모두 합치면 12수가 나옵니다. 그 12수는 완성수(完成數)임과 동시에 완전수(完全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12제자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유능하고 훌륭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열두 사람 이상을 직접 주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열두 제자 이상을 직접 거느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4수·3수·12수의 근본기대가 사위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의 종류          

사위기대는 개인적 사위기대와 가정적 사위기대, 그리고 주관적 사위기대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3대축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3대축복을 이루는 첫 번째 사위기대는 개인적 사위기대입니다. 개인적 사위기대를 통해 개성이 완성됩니다. 개성의 완성은 인격의 완성을 뜻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분립되어 나온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본성상과 본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상적인 부분은 하나님 마음인데, 그것이 인간의 마음으로 창조되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몸인데, 거기에서 실체로 나온 것이 인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고, 몸은 하나님 몸을 닮아야 합니다.

 

벼 껍질 속에 있는 달콤한 물이 장차 쌀이 되고 볍씨가 되듯이, 우리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벼 껍질 같은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그 안에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심정과 참사랑으로 차고 넘쳐서 흐르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 심정과 참사랑과 인격을 닮아서 하나님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리와 법도와 질서를 지닌 절대적인 아버지이듯이 우리의 몸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서 하나님 앞에 아들딸의 자격을 갖추려면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인일체(神人一體)가 되고, 비로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실체를 갖추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마음이나 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야 하지만,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 스스로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아버지의 씨를 남자가 상속받아 실체화하고, 여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절대성 어머니의 난자를 지니고 태어났으니 그 절대성 난자가 아버지의 것으로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남자와 여자가 완성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성완성(個性完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개성완성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전체를 완성시키는 일입니다. 그 말씀을 지켜야 개인도 완성하고, 하나님도 완성하고, 하나님의 뜻도 영원히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책임분담입니다.

 

개성을 완성한다는 말은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닮아서 절대성 남자가 되고 절대성 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성 남자가 되고 절대성 여자가 되는 것이 바로 개성완성이고 인격완성(人格完成)입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남자)의 생식기는 이 여자가 주인이고, 너(여자)의 생식기는 이 남자가 주인이다.’ 하는 허락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타락한 세계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하나님도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전체가 사탄을 동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타락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온 세상에 밝히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어떤 일보다도 시급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개성을 완성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두 번째 사위기대는 가정적 사위기대입니다. 가정적 사위기대를 통해 가정이 완성됩니다. 이상가정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가정적 사위기대를 완성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는 이상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천주의 핵심이고 천주의 축소체입니다. 가정을 확대해 놓은 것이 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입니다. 영계와 육계는 바로 가정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 천주대가족(天宙大家族)을 편성한다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사위기대는 주관적 사위기대입니다. 주관적 사위기대를 통해서는 주관성이 완성됩니다. 인간의 주관성이 완성되어야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만물세계를 지으실 때의 어려움을 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탁자 하나도 쉽게 만들지 못합니다. 쓰이는 목적에 따라 설계도 달라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하고, 재료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허하고 혼돈한 가운데서 존재세계를 창조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 하나님의 심정을 안다면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밟고 다닐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개미도 그냥 발로 밟아서 죽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 당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고 전체를 투입해서 지어 놓은 만물세계입니다. 인간에게 주인이 되어 그 만물세계를 주관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지니지 않는 한 만물을 주관할 자격이 없습니다. 심정으로 만물을 주관하고 참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데, 심정과 참사랑이 완성되지 않은 자리에서는 주관성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주인, 창조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과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들에게는 만물도 주관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관성이 완성됩니다. 그런 세상이 이상세계입니다. 그 세계에는 절대 싸움이 없습니다.

 

사위기대의 존재양상     

사위기대의 존재양상은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통해 결정됩니다. 한 점과 한 점은 연결해도 직선밖에 안 됩니다. 직선은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합니다. 영원성이 없습니다. 원을 형성해야 영원성을 띠게 됩니다.

 

두 점을 이어 놓은 것이 선인데 원을 이루려면 그 선이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둘만 가지고는 수수작용이 안 됩니다. 중심이 세워져야 비로소 상하(上下)가 주고받게 됩니다. 그래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좌(右左)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이 있어야 우(右)와 좌(左)가 주고받습니다. 전(前)과 후(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이 없으면 한 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심축이 생기면 돌게 되어 있습니다. 상하도 돌고 우좌도 돌고 전후도 돕니다. 모든 존재는 원형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 각도를 달리하면 구형운동(球形運動)이 됩니다. 그 자체는 원형이지만, 한 중심을 통해서 상하·우좌·전후가 각도와 위치를 달리하면서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입체성을 띤 구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공은 둥급니다.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공은 굴러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중요합니다. 타락한 세계는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존재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절대가치(絶對價値)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동기가 원리본체이고, 중심도 원리본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어디를 가려고 해도 가고자 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동기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동기 자체는 목적이고,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 가치입니다. 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는 절대 변하면 안 됩니다.

 

절대가치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입니다. 절대가치는 절대성 위에서 세워집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절대가치를 세울 수 없습니다.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절대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이고, 절대가치는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요소인 참사랑·참생명·참혈통입니다. 절대가치의 기준은 한마디로 절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절대성이 세워지면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에서 사랑이 먼저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이 있으니까 사랑도 있지.’ 혹은 ‘내가 태어났으니까 사랑할 수 있는 대상도 있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본을 보면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생명은 나중입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생명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이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반대하면 죽기를 각오하면서 사랑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생명보다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결합된 것이 혈통입니다. 사랑이나 생명이 없으면 혈통도 없습니다. 하나님 본체 안에 있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는 참사랑의 씨고,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참사랑의 씨와 참생명의 몸이 하나 될 수 있는 자리는 생식기관밖에 없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자궁(子宮)입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 거기에다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씨를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성을 갖지 않은 생식기는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상속할 수 없습니다.

 

참사랑의 특권은 동등한 위치에 서는 동위권(同位圈), 같이 산다는 동거권(同居圈), 어디든지 동참할 수 있는 동참권(同參圈)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권(相續圈)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부부가 맺어지면 남자가 있는 곳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는 곳에 남자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동참합니다.

 

남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의 것이 되어야 사로 상속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상속권은 집이나 재산만을 상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상속권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생식기를 인간에게 상속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이 가정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참고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    

 모든 존재가 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을까요?

첫 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원력에 의해서 존재하십니다. 만유원력에 의해서 하나님 속에 있는 이성성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분립체가 되어 나옵니다. 그것이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다시 주고받으면 새로운 합성체가 되는데 그 자체가 생존·번식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며, 그 힘은 수수작용에 의해서 나오고,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영원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한 점만으로는 영원성을 갖지 못합니다. 두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는데 선도 한 점과 마찬가지로 영원성이 없습니다. 영원성을 가지려면 두 점과 함께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이 있으면 수수작용을 통해 원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분립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으로 분립되어 나오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습니다. 상하도 중심이 있고, 우좌도 중심이 있고, 전후도 중심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중심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원이 형성되지 않는 한 영원성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영원성을 갖기 위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존재법칙(存在法則), 곧 천도(天道)입니다.

 

창조주인 하나님도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십니다.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상대적존재(相對的存在), 또는 상응적존재(相應的存在)라는 말입니다. 상대적 관계가 아닌 것을 상극적 관계(相剋的關係)라고 하는데, 상극은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상극 이론은 타락에 의해서 나타난 잘못된 이론입니다. 한 점에서 출발한 한 존재라도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다를 때는 상극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상극적이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상대는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계시고, 그 사랑 때문에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수수작용을 통해 일체가 되면 기쁨이 생깁니다. 수수작용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필요합니다. 상대라는 말은 주고받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는 질서가 있고, 윤리가 있고, 규범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가치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는 질서도·윤리도·가치도 세울 수 없습니다. 상극적 자리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상극(相剋)이 아니라 상대적(相對的)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상극과 상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극적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선(善)과 악(惡)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위가 있으니 아래가 있고, 앞이 있으니까 뒤가 있고, 남자가 있으니까 여자가 있다.’하고 상대적인 개념을 쭉 설명해 놓고, 상극적인 요소인 산과 악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끌고 나갑니다. ‘악이 있으니 선도 있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잘 들어봐야 합니다. 잘못 하다가는 방향이 바뀌어버립니다.

 

언제든지 진리 앞에는 비진리가 있게 되는데 빛이 비치면 어둠은 자동적으로 감추어집니다. 어둠이 판치다가 빛만 나타나면 어둠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진리의 빛이 없습니다. 빛을 밝히는 진리가 ‘통일원리’입니다. 이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들면 들수록 비추는 빛의 범위가 넓어져 어둠의 세력은 없어집니다. 거기에서 자유와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