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 第三編 復歸攝理 - 第三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3)

2013. 1. 7. 11:20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第三 節 洗禮요한 人間性 標準으로 예수를 對함

 

 洗禮요한의 行動이 어찌 容恕받겠는가 生覺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行動이 아니었는가. 洗禮요한 亦是 예수를 대하여서 뜻 中心하고서 對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洗禮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야라는 自體는 좀더 高貴한 位에서 自己에게 보여지었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存在의 容貌이면서 自己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成事의 路程을 取하여 나가지 못하는 存在로써 어찌 메시아의 資格이란 너무나 距離가 멀었었다. 요한 亦是 그 時代的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百姓과 同一한 觀點으로 서게 됨이 큰 失手의 始作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百姓은 두 말할 수 없는 行動이었다.

 

 그 洗禮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야라면 全 侍從하기 위하여서 自己를 中心하고 其 外 弟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弟子가 되어야 할 立場이었는데 그것이 果然 人間性에서 나온 破壞行動이었다. 自己 弟子들과 함께 예수 弟子가 되어 昨日의 先生의 立場을 變하여 예수 앞에 弟子 樣으로 서니 弟子였든 者들과 同級的 立場에서 其 立場이 果然 人間世界에서는 어려운 事實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觀點 等은 人間의 全部가 自己 中心하고 하날을 대하고저 하는 代身 사탄 工作이라고 보여주는 結果를 招來하여 사탄과 合하는 方向으로 나가는 셈을 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論하는 것은 無根據한 原理위에서 論함이 아니다. 聖經에서 洗禮요한이 一大 失手의 行動을 暴露한 句節을 찾아서 解說하여 보자. 至今까지 神學界에는 難解 問題의 句節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十一章을 보면은 그 內容的 事實이 如實하게 들어나 있다. 卽 예수께서 12弟子에게 命하심을 畢하시고 거기에서 離사 敎洲하시며 領布하시라고 各城에 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獄에 있어 그리스도의 行함을 聞고 그 弟子들을 遺야 예수께 亶야 曰 當身이 來실이니까. 先生任이 오닜까 我等이 他人을 待하리까 예수 對答하여 曰 爾等이 往하야 聞고 見난 것으로 요한에게 告하대 귀머거리가 드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癩者가 潔하며 눈먼자가 보며 貧者가 福音을 傳한다하라. 그런지 我로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있도다 하시고 被等이 離메 衆애개 요한을 指하야 言하시매 爾等은 何을 視라고 野에 去더냐. 風에 動이닌 갈대냐 또 爾等이 何을 視라고 去더냐. 美服을 衣한 人이냐 美服衣한 사람을 大闕에 있나이다. 爾等이 어찌 去더냐. 先知者를 見하랴더냐. 是하다. 我가 爾等에게 말하노니 此人은 先知者보다 勝하니라. 此人을 指하야 記錄하였으며 見할지어다. 我가 我의 使者을 爾等 前에 遺하노니 被가 爾路은 爾前에 豫備하리라 하였나이다.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이나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 小子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洗禮요한이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 得하나니 用力난 者는 奪나니라. 諸 先知者와 律法에 豫言한 것은 요한까지 至하였으니 萬一 爾等이 그것을 肯受할진대 來리라한 엘리야가 此人이니라. 耳가 有서 聽者는 聽지어다. 次世代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譬喩컨데 兒孩가 市場에 座하야 同類를 불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야 나팔을 吹하여도 爾等이 舞지 않고 我等이 哀音을 하여도 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來하야 食지도 않고 飮지도 아니하매 被等이 語하기를 邪鬼가 들렸다 하더니 人子는 來하여 食하고 飮하매 또 語하기를 食하기를 貪하고 酒을 嗜하는 人이요 稅吏와 罪人의 親舊로라하니 다만 智慧는 그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고 以上과 같은 言을 宣言하였다. 이 內容全部는 洗禮요한 對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弟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自覺하여라 하면 서 여러 異蹟 奇事로써 表示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對答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對答하여 옳도다. 내가 來하고 한 者로라 하면은 그만 解決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들어 말한바는 人間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敎示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意義가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 理由는 貴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成功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全部가 가르쳐주고 全部끌어다 주면은 그 貴한 自體를 찾지 못한 者 어데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自己들이 智慧를 通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여야만이 그 뜻 成事는 勿論 하날의 協助하여 주었지만 自己 努力으로 찾으여야만이 墮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結果를 보기 爲하여 그 찾는 賞給에 對한 榮光받을 資格이 決定되는 바이므로 最終點까지는 敎示하여 주지 않는바이다. 例를 들면은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路程의 表示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中 100까지 全部를 敎示하면은 그 賞給은 하날에 있는 聖徒들 앞에서라도 그 榮光누릴 資格完成者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自己 智慧를 通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래서 敎示하는 바가 지금 役事 路程에서 많이 보여지는 事實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成事하는 그 事實은 100의 成事한 榮光을 누리고 基本權限을 決定하는 事實이니 이와같은 例로서 洗禮요한 對하여서 對答한바도 事實이다. 또 洗禮요한 한테도 하날로써도 이와 같이 敎示하였다. 智慧로 찾아서 義로 定함을 주시고저 하여서 예수는 메시야라고 確定지어 敎示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至極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攝理인 同時에 누구에나 許諾한 예수니 智慧있는 者만이 合하여만이 원수의 智慧를 破할 수 있는 基本動力이라는 根本의 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攝理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特히 어떤 目的을 敎示하였다가 다시금 試驗하여 그 目的 對한 疑心을 發하게 敎示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智慧로서 그 根本을 確得할 수 있는 資格者가 되어야만이 하나님 自身이 直接干涉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對하여 勝利할 資格者로 세우려니 이런 試驗도 있는바는 靈敎示로 받는 者들의 體驗하는 事實的 根本意義로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對하여 反對役事할 수 잇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完成格者 되면은 全部를 하나님의 干涉을 하지 않고 自由成事를 標準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對取하기 爲하여 攝理하심은 알어야 한다. 智慧로서 뜻 찾어 完成하는 者는 저 하날 圈에서도 말할수 없는 貴한 存在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存在의 資格은 智慧를 찾음으로 만이 尊敬의 價値를 볼 수 있는 根本의 行動이 즉 智慧로 뜻 成事를 完成하는 態度이다. 그리고 貧者에게 福音을 傳한다 하심은 큰 意味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百姓 全部가 메시야를 苦待하기를 自己들이 더 좋아지기 爲하여서 苦待하였기에 至今 이와 같이 나 自身은 너희들이 바라는 目的相對로 되지 못하여 貧者와 같은 者 밖에 相對할 수 없는 貌樣에 있다함을 告하는 同時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富한 것이었기에 나 對할 수 없었다는 것을 間接的으로 表示하는 말삼이었다. 이 말삼은 사탄이 主管世上에서 善은 밝혀 貧者級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惡의 主管世上이니 惡者는 富하고 善者는 貧하니 이런 原理的 言詞로 되어 있는 것 알어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삼하시기를 誰던지 我를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有하도다 하심의 句節을 보게 된다. 이 句節이야 예수님의 숨은 心情을 表示한 말삼이었다. 卽 이 말삼에는 벌써 洗禮요한은 내에게 犯罪하였다는 結論的 事實을 告白하는 것이다. 犯罪하지 않은 者는 福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福된 立場에서 離脫한 存在하는 것을 暗示한 바이었다. 果然 예수 앞에 洗禮요한 한 自體는 크나큰 打擊의 存在이었다. 예수의 全目的의 大部分에 一大難事를 招來케 한 큰 犯罪라는 것은 더말할 나위없는 事實이다.

 

  그 다음은 爾等은 무엇보려 曠野에 出더냐. 그 目的이 무엇이던지 그 野에 나아감은 全目的은 예수한 自體를 보기 爲하여 行動한바가 아니냐. 또 野에서 요한 自體가 證據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어야 할 時期를 놓치고 至今와서 이렇게 行動하는 것을 暗示하면서 責望하는 말삼이었다. 그러나 그 證據한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서는 第一큰 者라고 하면서 말삼하시었다.

 

 野에서 본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도 큰 者라고 하나 할 責任을 擔當하지 못하였다는 意味로 말삼하시는 말심아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하다. 天國에서도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에 結論的 判決을 내리웠다. 이 말삼이 지금 神學界에서 未解決點이나 그 根本意義는 예수 對한 洗禮요한의 犯罪行爲에 對한 責望의 말삼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어야 한다. 卽 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고 하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 洗禮요한보다 雄大者가 起함이 無하다함은 이 말삼에 對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昔日의 先知者도 女人을 通하여 生하고 至今 洗禮요한도 女人을 通하여 生한 者라는 것은 틀림없는 事實인데 왜 洗禮요한이 第一로 큰 存在라고 하였는가 하면은 先知者라면 하나님의 뜻을 豫言하시어서 뜻을 알려주는 代辯人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洗禮요한은 亦是 하나님 뜻을 알리는 代辯人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存在이나 그 自體들이 證據 立場을 취하여 보면은 昔日 先知者 全部는 證據하되 豫言的 證據로서 예수를 證據하였으나 洗禮요한은 證據하되 直接的으로 證據하였으니 證據的 立場을 中心하고 말할 때 洗禮요한의 以上가는 者 없음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證據的 立場을 두고 洗禮요한에 對하여 말할 때 果然洗禮요한은 女人으로난 사람中에는 第一큰 存在라는 根本意義가 確實하다는 것을 明白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은 무슨 意義냐 하면은 根本意義가 이러하다.

 

 天國에 간 者도 女人으로 난 者들이다. 그렇다면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이 第一 大하다고 하였는데 왜 天國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第一 작은 者가 洗禮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疑心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關門이다. 이 根本意義도 洗禮요한의 犯罪的 行爲를 責望한 重大句節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至今 洗禮요한은 예수를 메시야로 證據하여 놓고는 自己는 自己 멋대로 行하였으니 예수에 對하여서 積極 存在가 되어 行하여야 할 立場을 떠나서 行動하였으니 큰 犯罪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야로서 侍奉하여야 할 中心 存在가 侍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破하는 行動을 하였으니 그 自體에서는 果然 天微者의 行動力이 아니라 할수 없다. 洗禮요한이 積極侍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날에서는 至極히 큰 存在가 될터인데 侍奉치 못하니 天에서 微者보다도 못한 存在로 되었다하는 意味였다. 卽 천에 있는 聖徒나 또 天使나 어떤 存在라도 예수 對하여서는 메시야란 根本存在라는 것을 다 알고 極心으로 侍奉하고 있는데 侍奉할 中心存在가 侍奉하지 못하니 侍奉에 있어서는 最微者가 되었다하는 意味를 알어야 한다.

 

 이 말삼은 侍奉을 中心하고 말삼하여서 洗禮요한에게 對한 犯罪行爲를 策함이라는 重大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써 得하나니 用力하는 者는 奪하나니라 하심의 말삼도 亦是 洗禮요한 對한 犯罪之事를 指摘함의 말삼이었다.

 

 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라는 말삼은 무슨 뜻의 말삼인가 하면은 먼츰은 洗禮요한 自體가 뜻을 받들어서 侍奉하였다면 예수님의 首弟子는 洗禮요한이 될바는 定한 하날의 目的이었는데 用力하지 못하였기에 卽 侍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至今까지라는 中에 요한이 先有權利를 주었든 큰 位置를 指示한바였는데 그 位置를 지키지 못하니 그 指定되었는 位置는 用力하는 다른 弟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指摘함이었다.

 

 그런고로 天國은 用力하는 者는 奪하니라 하심이었다. 豫知 豫定은 根本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根本이다. 그런고로 用力하는 다른 弟子들한테 그 位를 奪심이라는 根本意義를 明白하게 表示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洗禮요한이 犯行한 自體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날적 反逆者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存在 對하여서 오늘날까지 尊視하였다는 過去 信仰者의 無知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防止할까. 果然 痛憤한 事實이다. 이 事實의 行動으로 因하여 예수의 十字架의 難의 始作을 再促하는 行動이라는 것을 밝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世上이 食口 飮치 않으니 邪鬼가 들렸다하고 나도 食口飮하니 稅吏와 罪人의 親舊라하니 다만 智慧는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삼 中에는 世上이 함부로 하날뜻을 不知하면서 自己 멋대로 定하여 評한다는 것을 指摘하면서 뜻을 갖고 온 者를 對하여 조금도 應하는 者 없다함을 譬喩하여 兒孩가 市場에서 座하야 同類를 吹하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여 나팔을 불어도 爾等이 舞치 않고 我等이 哀音하여도 너희들이 胸을 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世上을 譬喩하여서 現在 뜻 中心한 自己의 目的要求에 조금도 應치 않음을 指摘하심이었다.

 

 그러나 智慧로운 者만이 하나님의 뜻을 行義로 顯낸다하심의 警告를 볼 수 있다는 바를 至今 敎人들이 아는가. 이와같이 初臨예수 앞에 展開되었든 眞狀이 至今 再臨을 바라는 世界信者들과 바리새 敎人들과 比하여 볼때에 뜻에 屬한 存在가 至今 信徒 中에 몇 名이나 있겠는가! 이와같이 根本原理들은 末世가 되니 뜻 成事時期가리니 明白하게 되어야만이 再臨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根本의 뜻 알고 侍奉者는 하날에서 第一큰 者라는 것이 끝날도 付與하는 事實이다. 이와같은 環境을 본 예수 앞에는 曠野라는 서러움의 路程을 展開시킨 根本原理이라고 위에 論한바를 理解할줄안다. 이런 根本을 밝히지 않으면 積極反對할 者들은 現敎界 信仰者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根本을 알적에 큰 두려운 問題라 아니할 수없다.

 

 以上 論한바 根本問題는 洗禮요한 自體는 하날적으로 豫定的 存在였으나 그 使命을 侍奉 못하게 될 때에 하날은 뜻 侍奉의 價値를 알고 侍奉하는 者가 하날적 豫定的 目的을 繼承하여 完成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攝理를 돌리어 役事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豫知 豫定的이라는 것은 뜻을 中心하고 말씀한바이지 뜻 對하는 사람을 對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現實 信仰界의 豫定論 等은 그 問題外 位置것으로 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