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 第三編 復歸攝理 - 第三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2

2013. 1. 7. 11:21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第二 節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根本意義

 

 하나님이  根本 뜻을 成事하시려 할 때에 그 뜻 成事에 제일 要點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外 사탄 存在가 有한 것인데 이 存在가 하나님의 根本 뜻을 破壞하였고 至今까지 敵으로 나와 뜻을 成事하지 못하게하는 存在가 있기에 큰 重大한 問題가 된다. 萬一 사탄이 없다면 뜻 成事는 問題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人間을 대하여 自己의 所有圈外로 보내지 않으려고 極性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對에하여서  役事를 하여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成事는 歷史로 延長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이를 全幅的으로 屈服시켜서 뜻을 未成事게 하는 工作이 없도록 사탄 全滅을 期하는 바가 要求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根本 뜻은 뜻을 防害하려는 사탄을 뜻의 路程에 없게 하고저 함에 根本 뜻 中心이었다. 그런고로 이 根本 뜻을 成事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反對하는 사탄이를 屈服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야의 뜻) 成事 路程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工作이 먼츰 問題이었다.

 

  이 問題를 解決할 責任者로 보내마 하신 存在가 卽,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아다싶이 하나님앞에 혼자서 사탄 全部하고 싸운 最勝勢者이었다. 엘리야가 要求하는 當時의 最高 目的은 사탄 全滅의 目的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目的이었다. 그 目的이 卽, 하나님이 바라는 뜻 成事 路程을 두고 바라보는 目的과 같은 目的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神(사탄) 八白餘를 滅한 者이며 뜻 成事 路程을 完成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重要存在 였다. 엘리야의 目的은 完成하였는가 하면은 그 當時 사탄 대한 目的은 未完成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侵入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侵犯할 優廬性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對立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根本目的을  完成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自體의 踪蹟이 없게하기 위한 代表者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全滅工作成事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洗禮요한으로 表示한바며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目的이 있는 바이다. 卽 엘리야의 目的이 洗禮요한으로 完成할 使命的 役割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目的의 成事는 洗禮요한으로 終結짓게 되는 것이다. 洗禮요한이 와서 한 使命達成하면은 하나님 뜻은 完全成事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路程上에서 없애고저 함에서 豫言하신 엘리야가 洗禮요한이었다. 例를 들면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成事하는데는 甲(엘리야)과 乙(요한)이 完成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中心하고 말할때 甲=乙 이라는 한 몸으로 完成한 것과 같은 根本意義를 두고 豫言하심이있기에 엘리야=洗禮요한 이라고 하심이 根本目的이 完成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甲\乙

               

 이런 뜻으로 말삼 하심을 아지 못하는 百姓은 큰 犯行의 行路를 取下面서 自然스러운 뜻의 行함이라고  生覺하였다. 이제 엘리야 代身으로 보냄을 받은 洗禮요한의 使命은 무슨 目的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目的 뜻 成事가 完成 하여야할 土臺를 造成하여 메시야 卽 예수 自體한테 被害 없게끔 하여야 할  歷史的 責任이 負擔되어 있다.

 

洗禮요한의 하여야 할 使命은 엘리야의 心情과 才能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달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同時에 子息으로 其의 아버지께 孝道하게 하여 줄 歷史的 使命性을 말라기 四章 五節, 六節에 記錄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卽 누구나 다 全人類의 祖上인 同時에  全人類는 예수의 子息이라는 創造原理로 되어있는 目的 찾어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責任이 요한의 使命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防備하고 內的으로는 百姓으로하여금 子息된 道理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其 時代에 대한  責任을 蒹有한 重大立場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洗禮요한의 全 目的은 메시야의 道를 準備하는 者로써 卽 메시야 한 분만이 그의 生命의 代身이며 希望과 所望의 全部의 存在이었을 것이었다.

 

  또 自己  自身이 알고 있어야 할 事實이었다. 그리하여야 洗礼요한의 曠野生活이라는 全 目的은 여기에 完成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六個月 前에 사가랴의 家庭에서 태어난 그 自体는 하날이 無限한 期待로서 보낸 者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存在이었다. 其 時代를 代表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三十余年生涯 모두가 예수(메시야) 한 存在가 目的인데 그 메시야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榮光이 그대의 目的이었다. 洗禮요한의 뜻을 全 이스라엘  百姓앞에 洗禮를 施行하게되었다. 洗禮는 예수의 그 根本 뜻을 成事할수 있는 한 터의 資格을 賦與하여 주는 約束의 表示의 禮이었다.(요한 福音 一章 三十一節~三十四節)

 

  洗禮요한이 이 礼式을 施行 함은 自己 뜻을 成事하기 爲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繼承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當時 洗禮요한을 이스라엘 百姓은 하날이 보내신 한 先知者로 알고 있었다. 그래 洗禮요한 한테 이스라엘 百姓은 洗禮式이나마 洗禮요한에게 洗禮를 받음은 하날로써 보내심을 받은 者로 알고 있든 까닭이므로 新法(요한복음 一章 十五節) 其 洗禮를 받음이었다.

 

 이 洗禮요한은 證據하기를 自己는 물로 洗禮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야는 火와 聖神으로 洗禮를 준다고 하시며  大衆앞에 宣布하심은 自己自身의 使命과 메시야의 使命은 格別하게 相異있음을 告白하는 바이었다. 그래 洗禮요한은 全目的 實體 메시야의 한 存在가 所望城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江에서 洗禮를 배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江에 至하여 요한한테 洗禮를 받고저 할때에 洗禮요한은 辭하야 말하야 가라대.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있까하니 예수 말삼하시기를 許諾하라. 우리들이 義를 行하는 것이 合當하리라 하신데 洗禮요한이 許諾하여 洗禮를 施行함을 받고 水에서 올라오시니 天이 開고 하나님의 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其 우에 臨하심을 보시더니 天로써 聲있어 言하사대 此는 我의 愛子요 我의 (기뻐하는 者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聖神이 나린 根本意義는 이와같은 하날의 뜻의 存在라는 것은 洗禮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其때 누구나 全部가 이 事實을 듣고 보았든가 全部는 아지 못하였지만 洗禮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目的을 責任진 洗禮요한한테 알리어 全이스라엘 百姓한테 傳하여서 하날뜻을 成事하게 하고저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날로부터 예수는 메시야라는 것과 하날로 보내신 特別한 者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洗禮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야라고까지는 指摘하여 敎示하여는 주지 않았다. 知慧롭게 行動을 取하여야 하는 한 段階에 處하게 되었다. 그때에 洗禮요한은 自己가 바라든 메시야를 맛난슴은 그 以上 무슨 딴 目的이 어데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使命的 外部分을 要求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事實인 同時에 기뻐서 大衆을 대하여 積極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야라고 宣布하여서 大衆이 예수앞에 集結하게하는 同時에 自己도 亦是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代表的 態度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自體의 態度 如何로 因하여 大衆에게 큰 影響을 傳하는 重大立場에 있다.

 

  그런데 洗禮요한이 예수 對하여 積極的으로 예수 自身은 우리가 바라는 目的의 存在 메시야라고 大衆앞에 宣布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江에서 洗禮 받을때에만 알뿐이고 洗禮요한은 그냥 그대로 自己가 처음 始作한 洗禮나주면서 다니는 行動을 繼續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大衆은 메시야라고 보는 것 보담도 洗禮요한의 行한 行禮의 도움자로써 아는 者라고 生覺하는 者는 있는 程度이었다. 洗禮요한의 目的은 그저 洗禮나 주고 다니는 것이 歷史的으로 賦與받은 全使命이었든가. 너무나 價値없는 行動이었었다.  全이스라엘 百姓대하여 生命 繼承의 한 中繼存在가 그냥 멋대로 四方을 自由로히 다니면서 洗禮만 준다는 行禮에는 우리는 寒心한 態度로 注目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은 亦是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代身 存在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은 疑心할 問題이다. 요한 福音 一章 二十一 節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自己 自體가 그 使命的 立場을 明白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自己 自身이 알았으면 왜 大衆앞에 自己를 宣布하여서 이스라엘 百姓의 疑問点을 없이하여야 할 責任도 準備 못하였든 바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은 大衆에 대한 責任을 勘當하여야 할 存在로서 어데 그 責任을 다하기 爲하여서 싸워서 그 基臺를 세웠든가 自己 自身도 確固한 엘리야의 代身者라는 것은 自覺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事實이었다. 이렇게 洗禮요한은 自身使命에 대하여 積極的 準備 工作을 하여서 그 目的 本體로 오신 예수 앞에 全을 侍從의 중심 存在로 서서 예수의 全 使命의 協助者로서 또 第一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弟子로서 侍奉하는 外에 더큰 다른 무슨 目的이 있었으랴. 그런데로 不拘하고 예수와 分立하여 行하신데는 洗禮요한이 하날 앞에 重大한 責任 未完成을 가져오는 基本的 代身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는 事實이었다.

 

  聖經을 보면은 洗禮요한은 全幅的으로 메시야라는 것을 確實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獄中에 있어서 弟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야니까 하는 質疑, 또 다른 사람을 기대리 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은 洗禮요한 自身도 메시야에 對한 解決을 못하였든 바를 알리워 준다.  이와 같이 뜻 侍奉者가 되어야 할 그 存在조차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아러주지 못하니 예수 自身에 있어서의 全期待와 所望은 如何한 程度이였을까?  果然 痛恨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心情을 알 者 있었으랴. 여기에  洗禮요한이 예수 앞에 하날 앞에 큰 犯行의 始作이 있다는 것을 아는者가 現基督敎界에 없는바를 나도 痛憤하는 바이다.

 

 그저 洗禮요한은 貴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存在 待遇하는 것은 容恕 할수 없는 行動이라  아니할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自己 責任 다하지 못하고 自己 뜻대로 行하는 洗禮요한이는  아바지 앞에 貴함의 存在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아라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者가 其 本使命 中心地을 떠나서 行하는 其 自體는 勿論이며 其의 侍從者까지 하날로서 善아히 對버할 수 없는 存在로써 그 末路에까지 하나님은 貴히 보지 않음은 事實이다.  이와 같은 重大之事 如何가 예수 앞에 크나큰 曠野生活이라는  苦痛의 路程을 斷行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原因이 되었다. 曠野에 나아갈 때에 孤獨한 心中을 헤아려 同情하는 者 世上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相對하여 예수의 使命範圍는 한 暗路에 逢着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者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曠野의 寂寞感은 예수 앞에 큰 落望과 同時에 다시금 再出發의 한 路程을 決心케 하는 路程이라 아니 할 수 없다. 曠野까지 예수를 侍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츰 예수를 메시야로 모시는 者 있다면 이는 하날에서 내리는 큰 賞을 받을 存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生覺하면 東方博士는 어데 갔는고, 牧者는 어데 있는고. 母親은 어데 갔는고. 洗禮요한은 어데 갔는고. 모다 自己 뜻 中心하고 行動하는 其 自體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變하여 嘆息하게 하는 한 存在 等에 不過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激動시켜주는 基臺에 틀림없는 存在들이었다. 그런 心情을 품고 曠野生活에 있어서는 第一次 落心을 다시 復歸하기 위한 目的인 同時에 積極的 원수 사탄 對하여 最終 決判時期이었다. 사탄이 벌써 하날 뜻 成事할 터를 侵入하여서 뜻 順從 路程을 받들지 못하는 洗禮요한의 期待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中心 自體인 예수까지 와서 試驗의 試圖는 原理的 한 行動이었다. 그러니 曠野生活 中 사탄의 自由行動에 對比한 예수에 試驗이었다함을 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