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 第三編 復歸攝理 - 第三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1)

2013. 1. 7. 11:22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第三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第一節 地上攝理 路程에 대한 根本意義

 

 舊約時代의 全目的 終結은 예수 한분에 基因하며 그의 完成的 使命도 예수 한 存在가 中心이었다. 聖殿을 세우기 爲한 行義의 路程은 舊約時代의 한 中心路程이었고 그 路程脫線은 不義라는 死亡의 始作이라 한 것은 잘아는바다.   예수 한 存在의 價値는 卽 全 이스라엘 聖殿 + 이스라엘 百姓보담도 貴한 한 存在이었다. 卽 四千年 歷史를 通하여 하나님이 攝理한 結實의 自體가 예수였다. 왜냐하면은 하나님 全天宙目的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價値의 存在니 이 모든 것보담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貴한 存在이었다. 예수 完全히 살아서 天宙살고 하나님 完全히 살며 예수뜻 成事하여야 하나님 뜻 成事라는 한 中心點의 存在가 地上 예수였다.

 

 하날 成事로 예수 하나로부터 始作이라는 原因은 더 말하지 않어도 잘 알줄안다. 이 天宙의 中心點 예수의 한 存在가 地上에 오는 바는 地 아니면 뜻 成事 못하는 하나님의 創造原理의 中心地가 卽 地上이었다. 地上에서 사람 祖上 아담 해와는 墮落하였으니 땅 中心하고 復歸하여 그냥 하나님의 萬世 前 理想 卽 創造理想을 原理되로 成事할 수 있는 條件成事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날은 未完成하여만이 하날 뜻 圓滿成事하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同一한 基点上을 分離할 수 없는 理由는 한몸된다는 基本因果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貴한 한 存在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前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被害를 받지 않게하기 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根本自體 오신 다음에 前이스라엘 百姓의 大歡迎 받게하여 全 百姓은 예수한분 만으로 無限한 榮光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信과 侍여야할 使命的 責任들을 다할 수 있는 具備條件을 지어 놓기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目的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서는 直接引導하여서 뜻 侍奉으로 培養하였지만 世界的으로는 하나님은 全人類에게 모실수 있는 工作도 歷史的 聖人들을 通하여서 東西洋에 攝理를 하여 合成化 할려고 하는 뜻 成事 豫備 工作도 始作케 하심이다. 其 使命的 代表 人物들이 卽 孔子며 釋迦이었다. 또 哲人 소크라테스 等等의 良心的 道를 중심한 善을 標準하고 敎示케함도 그 根本意義였음을 알어야 한다. 어느 宗敎든지 근본을 善한 神을 標準케 함은 卽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目的을 根本하고 있다는 바를 明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根本 뜻 成事하면은 그 自體인 가르침들도 한 根本上에서 總合을 보여야 되는바도 原理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存在의 理想中에 뜻 中心이니 全 하나님의 理想을 完成할 根本体이니 예수의 뜻 成事時는 全 天宙는 한 中心에서 起動되어야 한다. 宗敎도 經濟도 科學도 合하여 한 基本上에 起動될 바이다. 그런 目的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어 맞추고저 함의 根本意義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使命的 中心 存在의 降生과 함께 온 天宙는 큰 福音의 消息을 보았다.

 

 하날은 勿論 예수의 뜻 成事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指導받고저 함이 요구이었다. 예수 한분이 모든 生命의 근본이며 解放의 主人公이었다. 그것은 卽 사탄 世界인 非公式世界서 原理世界 예수의 世界에로 建設目的의 完成의 要求가 예수의 할 責任인 同時에 우리는 그에게 順從 信從 侍從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질머진 責任使命이었다. 이 責任의 要求를 成立할려니 엘리야 와서 할 使命全部는 全百姓 合하여서 엘리야와 合心一體가 되어서 뜻 圓滿成事고저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잘알고 있는 昇天한 存在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줄알았다. 昇天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날 向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中心으로 되었다. 卽 하날로 올라갔으니 하날로써 나려올줄만 바라본 바는 事實이었다. 昇天한 엘리야로 그 當時 第一 貴하게 바라는 한 相對로 된바는 메시야 때문이었다.

 

메시야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必然的 要求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날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者는 至今까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信者 等이다. 메시야로 왔든 것은 事實이매 至今은 全世界的으로 歷史를 通하여 確固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當時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生覺할 수 없는 存在로 取扱되었든 바는 聖經보아 잘알 수 있는 바이다. 卽 바리세 敎人과 書記官들은 예수 對하여서 몇번식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야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데왔는가? 하면서 예수 對하여 反問한바는 自己들이 歷史的으로 바라는 事實과 符合하지 않은 事實을 告白하는 것을 聖經에서 많이 볼수 있는 바이다. 果然 當時에는 참말 믿고 順從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야라는 그 存在는 그대들이 잘아는 요셉의 子로서 집에 뭇치어 木手業으로서 어제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存在이며 그 內容內幕까지 잘아는 그 自體이며 生活體型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自體인데 어디 그 存在가 自己들이 바라는 理想한 中心存在라고는 生覺하는 點에 하도 먼 距離의 存在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이었다. 우리가 바라든 그 存在는 千數百年間 約束의 存在요 希望의 存在든 自體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百姓은 무슨 영문인지 큰 患難의 한 存在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야를 바람은 全部 뜻 中心하고 바라는 것 보담도 먼츰은 自己를 中心하고 바란바는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은 自己들의 메시야 오면 한 조각의 食物이나 居處할 房이나 衣服이나 그 中 한가지라도 準備해놓고 베들레헴을 向하여 먼츰 무슨 色다른 消息이나 있는가 하여서 苦待한 者 萬一 있다면은 메시야 誕生도 알았으리라. 그런 存在조차 없었다는 事實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야 苦待는 벌써 全部가 自己 中心이었고 自己들이 메시야의 힘을 비러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事實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各自 各自는 自己들이 理想에 符合하는 以上의 存在로 바랐다는 其 立場에 있을 때 예수란 者가 出顯하여 너희들의 理想의 存在라는 宣言은 하도 너무한 同時에 憤慨할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果然 예수는 肉身쓰고 나니 自己들과 同一樣式으로 살어왔고 또 至今도 變함없이 同一한 樣이니 果然 그 自體에 對하여 疑心하는 바 當然之事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對하여서 더 疑心케 된바는 엘리야가 前提問題의 存在였다. 自己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者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야니 如何튼 問題는 解決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야 왔다니 그 어찌 信任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生覺할 必要를 느끼면서 昔日에 이스라엘 百姓을 辱하여 되는 問題다. 그러면 至今은 예수 卽 메시야가 萬民의 救主요 이스라엘이 希望한 中心存在라는 것은 歷史的으로도 認識過程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야며 뜻하신 豫言의 實體라는 것을 알며 그 前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世上 敎人들은 다 아는 事實이다. 卽 엘리야는 왔는데 洗禮요한 이라는 것을 歷史로서 認定하여주는 聖經을 보아 아는 事實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任意로 待接하였다고 하면서 福音書에 洗禮요한을 指摘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間接的 知이었다. 果然 그 當時의 立場을 바꾸어 가지고 生覺하면은 至今은 果然 메시야로 信 侍 順從을 할 者 몇 名이나 될까? 지금 現敎人들이 바리새 敎人信仰 만치도 못한 者 많은 이 때에 生覺할 問題이면서 念慮할 重大問題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洗禮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根據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攝理하는바는 무슨 意義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洗禮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問題의 根本을 먼츰 알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根本意義를 밝히지 못하는 現實世界가 하날이 攝理하는 뜻의 侍奉을 完成할 것인가. 지금은 末世라고 하는 때이니 聖經 中에 未知였든 事實이 明白히 되어야만이 聖經目的을 끝내고 再臨主를 迎接할 수 있는 決定的 關門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重大視 되는 未知의 根本을 밝히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