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 第三編 復歸攝理 - 第二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 (1)

2013. 1. 7. 11:25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第二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

 

第一節 노아부터 아부라함까지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審判을 通하여서 노아의 八食口는 第二次로에도 繁殖하여지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 攝理完成으로 始作과 同時에 結果로 나아가야 할 使命的 責任의 分擔은 卽 하나님의 뜻을 믿고 順從하는 것이 노아 後孫에 맡겨진 重大課業이었다. 그런데 全人類를 審判하고나니 사탄은 自己를 崇拜하며 섬기는 全人類를 잃고나니 사탄은 뜻 부칠 곳 없이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떠러질수 없는 關係的 因緣이 있는 以上 하나님 뜻 外에 部分 存在가 있으면 自己의 所有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다시금 하나님 한테 自由 屈服치 않고 노아의 八食口에 對하여 未練的 立場으로 自己의 뜻 所有가 될 수 있는 存在가 있는가 또는 自己가 取할 수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이나 없는가가 사탄에게 있어서는 要求하는 重大 注目点이있다. 이 어마 어마한 立場에선 者들이 卽 노아 8食口였다. 이 食口들은 하나님과 사탄사이에 있어 自己들의 根本 責任을 勘當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卽 하나님便으로 갈려면 사탄이 따르고 사탄이 따르면 하나님이 滅하는 이런 立場에 서 있다는 바를 그때 原理的으로 안다면 모르지만 이 原理를 알지 못하는 八食口는 그저 하나님에 對한 積極性을 體得하여야 할 存在들이었는데 그런 方向으로는 如何한 結果를 가져오는가는 人間에게 特有性 自由行動結果가 左右하는 問題이었다. 노아 食口는 全하날의 期待인 所望存在요 또 사탄이 빼앗고저 하는 所望의 期待의 存在이었다. 그런 立場에 있는 存在들 卽 하나님 보시기에 義로 여기는 存在들이다.

 

 이와같은 人間價値를 알고보니 이 사람이 그다지도 하나님을 받들지 못하였는가 하는 嘆息이 自然 나을 것이었다. 至今 우리는 이 原理로 보아 緊張한 立場들인 줄을 알 수 있는 福된 時期를 만남이 無限한 幸福스러운 것이었으나 이 時代에는 이 根本問題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한 수수께기의 問題였기에 그다지도 自己들 存在價値와 하나님에 對함과 사탄 對함에 對하여서는 그저 根本을 알지 못하고 그 結果만 보아서 하나님과 사탄의 關係가 反對性으로서 서 있다는 것만을 歷史를 通하여 알 뿐이었다.

 

 그 時에 노아는 天地의 主人公格이면서 第二次 人間의 祖上이 되는 存在의 行動 如何부터가 하나님과 사탄이 行動의 如何를 始作하는 基礎이었다. 그때 노아의 八食口 中에 罪라는 生覺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存在들이고 하나님의 義만이 始作되어야 할 存在로써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양이나 흉내가 보여지는 行動이 없어야 할 立場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아는 農夫가  되어 葡萄農事를 하였다. 葡萄酒를 먹고 취하여서 帳幕 內에 裸體로 누어서 잠자고 있을 때에 노아의 아들 함이 父가 벌고 벗고 지는고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自己兄弟들까지에게 가서 부끄러운 行動의 한 表示를 하니 셈과 야벳은 衣을 取하여 아버지 벗은 것도 보지 아니하고 뒷걸음으로 드러가서 아버지의 裸體를 더푼지라.

 

 이것이 聖經을 보면은 왜 이런 行動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인가하는 根本意義는 오날 未解決 問題이나 그 根本原理로 볼 적에 그 事實은 明白하여지는 바이다. 이 行動은 무엇을 象徵하여주는 事實이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至極한 미움의 行動이며 사탄 對이하여는 한便 될수 있는 아담, 해와의 벗음의 수치를 다시금 증거하며 墮落性 繼承을 表示하는 行動이며 사탄이에게는 하나님 앞에 自己의 立場을 세울 수 있는 根據的 問題였다.

 

 卽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墮落된 부끄러움의 自體임을 아직 잊지 못하는 存在의 씨라는 事實을 表露하는 行動이면서 또 全人類를 審判하심도 그것의 始作으로 因한하여 結果에 到達하여 지는 바에서 나온 바를 生覺하니 하나님은 痛憤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을 보여줌인 同時에 사탄의 性品 卽 犯罪한 直後에 行動의 繼承을 證據하는 事實이니 또 亦是 하나님의 뜻하는 根本目的의 未完成要素가 繁殖함을 알게됨이 또 다시금 사탄의 起着点을 보여주는 行動이였다.

 

 그런고로 다시금 사탄은 그 行動 開始를 보게 할 根據를 삼고 나서니 그 要求의 터를 막을 수 없이 사탄의 繁殖을 始作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行動을 直接 開始하게 한 그 存在가 사탄 便의 者이니 함을 對하여 가나안의 祖上이 되어 하나님의 怨讐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하나님과 사탄은 對立을 보게 되어 子孫을 繁殖하니 또 다시 그 子孫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으로 흘러나가게 되었고, 노아 前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繁殖에 協力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뜻 中에 품으려하는 者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사탄한테 屬하지 않게 하기 위한 對案이 要求되는 바이다.

 

 때 마침,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곳으로 흘러나가는 行動뿐이었다. 그것은 사탄이 즐거워하는 行動結果이니 이것을 그냥 두어 둘 수 없는 事實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言語가 하나이니, 全部가 意思가 通하여 한 곳으로 動作하는데, 全體的으로 움직이게 되니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날 便의 뜻 成事하기 위하여 도움되는 言語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塔을 쌓아 사탄 뜻 協力하는 行動의 基因을 가져오니 하나님은 言語를 相反되게 함은 뜻을 反하여 行動 協助物이 言語로써 한 方向으로 全人類가 흘러 드러 나갔으니 言語를 混雜케 하여서 그 사탄 뜻 돕는 길을 막고저 함이 人間 言語를 混雜시킨 根本意義었다. 그런고로 萬若 뜻 中에서 人間이 이런 塔을 쌓았으면, 또 이 뜻 成事로 나갔으면, 言語를 混雜케 할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런고로 世上에 뜻 成事時期가 오면은 言語는 하나의 目的으로 하날적으로 始作되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 뜻을 成事 協助하야서 統一된 言語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始作은 中心存在 卽 再臨主가 오면은 그로부터는 하나님의 言語와 創造的 主管 許諾이어든 世界主管世界는 根本的으로 復歸되어야 한다.

 

 사탄 뜻 돕는 바벨은 分岐하는 工作이었으나, 하날 對하는 뜻의 塔은 合體하여 하나되게 하는 工作이다. 하날 뜻 中心하고 復歸된 사람들이 뜻의 塔을 높이 쌓는 것을 보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 , 우리 理想의 터다.

 

 이렇게도 하나님은 사탄 對하여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言語 混雜케 하신 것이야. 人間에게 福된 일이 아니냐! 이와 같이 안타깝게 한 사람의 罪를 누가 勘當하랴! 이렇게 하였으나, 사람은 如前하게 뜻을 멀리하여 뜻을 세워서 받들면서 거기에 誠心다하는 者들, 보기가 甚히도 드물었다. 그래 하나님은 뜻에 품으려든 노아의 子孫들을 또 다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이것을 다시금 빼앗는 役事를 始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사랑하는 相對者 偶像 商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다시금 사탄품으로부터 빼앗아서 自己 뜻의 子孫을 빼앗긴 것을 다시 갚는 양으로 卽, 反對路線으로 찾아 세우기 위하여서, 사탄 團體 쪽인 偶像장사 데라의 아들 아부라함을 擇하신 根本意義가 있다. 그 理由는 사탄이 第一 싫어하는 바인 동시에 痛憤한 存在이었고 하나님 便에 있어서는 지극히 貴히 보는 存在이었다. 왜냐하면, 사탄품에 있다가 빠져나온 代表者요, 뭇사람의 本이 될 行動이면서, 다시는 사탄한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왔으니 들어갈 수 없는 立場을 取게하기 위하여, 아부라함을 擇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려는 딴 地域으로 引導함이 즉, 아부라함에게 要求한 것이 故鄕山川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根本目的이었다.

 

 그 때 아부라함이 하나님의 命令을 따르니 하날 대해서는 기쁨의 存在며, 사탄 對해서는 슬픔의 存在로서, 한 分岐路線을 세울 수 있는 中心存在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선 아부라함 뒤에는 怨讐 사탄이 未練을 갖고 따라들게 되었다.